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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란·재난 악순환 食人을 부르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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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6호 23면

사료를 통해 식인(食人)의 뚜렷한 기록을 남겼던 제(齊)나라 환공(桓公).

중국의 역사는 눈이 부셔 제대로 바라볼 수 없는 휘황찬란(輝煌燦爛)함의 연속이었을까. 이름을 대면 금세 알 수 있는 통일 왕조의 겉으로 드러난 면모를 볼 때는 그럴 수 있다. 그러나 겉만 그렇다. 그 이면은 아주 깊은 그늘과 어둠이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책이 『수호전(水滸傳)』이다. 중국 역대 문학 작품 중 대중성이 매우 높은 책의 하나다. 108명의 두령이 양산박(梁山泊)이라는 곳에 모여들어 관군(官軍)에 저항하는 내용을 그린 작품이다.


이 소설의 흐름에서 깊은 인상을 주는 사내 하나가 무송(武松)이다. 그의 형은 무대(武大), 형수는 반금련(潘金蓮)이다. 서문경(西聞慶)이라는 남자와 불륜을 빚은 반금련이 자신의 형을 독살하자 그 둘을 살해한 인물이다. 아울러 경양강(景陽岡)이라는 고개에서 호랑이를 맨손으로 잡아 죽인 일로도 유명하다. 용맹이 뛰어나고 완력 또한 아주 강하며 의협심 또한 돋보이는 캐릭터다. 이 무송이 술집을 들른 적이 있다. 손이낭(孫二娘)이라는 여인과 장청(張靑)이라는 사내가 부부를 이뤄 운영하던 술집이었다.


 

소설 『수호전(水滸傳)』에서 인육으로 만두를 만들어 팔았던 손이낭(孫二娘).

『수호전』의 손이낭, 인육 만두 팔아이 글에서 정색을 하고 소개하려는 인물은 바로 손이낭이다. 나중에는 무송과 친구의 의로써 맺어져 양산박의 108명 두령 명단에 이름을 올리는 여장부다. 별명은 모야차(母夜叉). ‘여성 야차’라는 뜻인데, 야차는 행동이 빠르고 민첩한 귀신을 일컫는다. 남성이 아닌 여성 야차는 힘이 세고 외모도 아주 예쁘다고 했다.


이 손이낭은 ‘독을 품은’ 여성이다. 독약을 지니고 있다가 술집에 들르는 손님의 술잔에 몰래 넣어 그를 죽인다. 아울러 그 시신을 도륙해 만두소로 만든다. 이를 테면 ‘인육(人肉) 만두’ 제조업자다. 술잔에 넣는 독약에 못지않은 독기를 품고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손이낭과 남편 장청은 나중에 무송을 따라 양산박에 들어가 ‘정보통’으로 활동한다. 양산박 산채의 서쪽에 술집을 차려놓고 바깥의 정보를 수집해 본채에 알리는 역할이다. 나중에 싸움을 벌이다가 칼에 맞아 죽는다. 그러나 그런 저런 스토리보다 우리의 눈을 번쩍 뜨게 만드는 대목은 사람의 고기로 빚은 만두다.


어디선가 이 비슷한 대목을 본 독자들이 있을 테다. 홍콩에서 만든 영화 ‘신용문객잔(新龍門客棧)’이다. 홍콩의 미녀 스타 장만위(張曼玉)가 술집 용문객잔의 주인으로 등장한다. 그녀의 캐릭터는 손이낭과 아주 흡사하다. 아무래도 『수호전』에서 영감을 얻은 듯하다.


황폐한 땅에 지어져 늘 모래바람이 닥치는 곳, 용문객잔의 분위기는 어둡다 못해 음침하다. 그곳에서 미녀 주인은 주점을 찾는 손님을 노린다. 마시는 술에 독을 타서 죽인 뒤 주방으로 옮겨 그 인육으로 만두를 빚는다. 그래서 ‘인육 만두’는 대중들에게 제법 유명해졌다.


사람이 사람을 먹는다고? 그럼 식인종? 그렇다. 사람의 고기를 먹는 사람은 식인종이다. 우리는 그런 식인종의 자취를 찾으러 아프리카를 여행했고, 동남아 밀림 지대를 섭렵하기도 했다. 그러나 사람이 사람의 고기를 먹는 행적은 멀리서 찾을 필요가 없다.


극심한 가뭄과 굶주림에 몰렸던 한반도에서도 아주 낯선 풍경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중국의 사례는 매우 도저하다. 쉼 없이 닥쳤던 전란, 다반사처럼 벌어졌던 대형 재난 때문이다. 둘은 어쩌면 깊은 상관관계에 있다. 천하 패권 다툼의 회오리가 벌어져 무수한 사람이 죽어 나가 경작을 이어가지 못해 기근이 벌어졌을 수 있고, 심각한 흉년과 홍수 등으로 먹을 것이 없어 혹심한 싸움으로 이어졌을 수도 있다.


그 둘의 깊은 관계를 따지기에 앞서 중국에서 벌어진 식인(食人) 이야기를 먼저 소개하겠다. 식인에 관한 중국의 역사는 장구하다. 아주 오래 전에 사람이 사람의 고기를 먹는 장면이 등장한다. 중국이라는 문명의 개체가 서서히 테두리를 형성하던 무렵에 등장하는 유명 인물이 하나 있다.


춘추(春秋)시대의 강력한 패자(覇者)로 등장했던 제(齊)나라의 환공(桓公)이다. 그는 중국 역대 재상의 으뜸이라고 일컬어지는 관중(管仲)의 보필을 받는다. 관중 또한 우리에게 익숙하다. 깊은 우정을 지닌 친구 사이를 일컬을 때 사용하는 성어, ‘관포지교(管鮑之交)’에 등장하기 때문이다.


관중과 그의 ‘절친’ 포숙(鮑叔)의 스토리는 여기서 생략키로 하자. 아무튼 포숙의 천거로 한 때 정적이었던 제나라 환공을 보필하면서 국정을 이끈 주역이 관중이다. 관중은 부국강병(富國强兵)의 냉정한 실천자였다. 부국에 이은 강병의 논리를 개발하고, 그에 따라 나라를 이끌었다. 그로써 제나라 환공은 춘추시대의 가장 강력한 패업 군주로 부상했다.


그러나 제나라 환공은 그런 사적(事績)만으로 유명하지는 않다. 자료에 따르면 그는 사람 고기를 먹었던 인물이다. 그에게는 명신(名臣)인 관중과 포숙도 있었지만, 간신(奸臣)도 적지 않았다. 그 중의 하나가 어용(御用) 요리사 역아(易牙)다.


환공은 이룬 업적이 참 많았던 군왕이다. 천하의 패업을 이뤘으니 더 바랄 것이 없었던 모양이다. 멀리 원정(遠征)에 나섰던 환공이 귀국의 길에 올랐던 때라고 한다. 그는 문득 “세상의 산해진미를 다 먹어봤지만 사람의 고기는 어떤 맛인지 먹어보질 않아 모르겠다”는 푸념 비슷한 말을 꺼낸다.


제나라 환공 “사람 고기는 어떤 맛인지…”그를 귀담아 들었던 인물이 바로 역아였다. 그는 출세에 혈안이 된 인물이었던 듯하다. 제 임금의 푸념을 깊이 새겨 그를 행동으로 옮겼고, 마침내 그런 눈물겨운 노력으로 인생 말년의 환공에게 가장 두터운 신임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 행동이란 무엇이었을까.바로 자신의 어린 아들을 바치는 일이었다. 제 아들을 죽여 음식으로 임금에게 올렸다는 것이다. 환공은 기쁜 마음으로 사람의 고기를 시식했다고 한다. 그가 결국 사람의 고기에 맛을 들여 더 많은 식인의 기행을 일삼았다는 기록은 없다. 그저 인육의 맛이 궁금해 ‘엄청난 잘못’을 한 차례 저질렀던 듯하다.


왜 ‘엄청난 잘못’일까. 필자의 주관적인 해석이다. 그로써 중국 식인의 역사가 마치 봇물 터지듯 벌어졌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 중국의 식인 역사는 참담한 심정을 자아내도록 한다. 대개가 전쟁터에서 벌어졌던 일이다. 아울러 전쟁과 맞물린 각종의 재난도 그를 부추겼다고 보인다.


당나라 시인 백거이(白居易)는 이런 시문을 남겼다. “올해 강남에 가뭄이 들어, 구주의 땅에서는 사람이 사람을 먹었다(是歲江南旱, 衢州人食人).”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일, 보통은 ‘인상식(人相食)’이라고 적는 경우가 많다. 아울러 그런 역사적 상황은 끔찍하게도 아주 많이 등장한다. 때로는 ‘숙식(熟食)’이라는 용어로도 나타난다. 전진(前秦)이라는 왕조의 왕 부견(?堅)의 친족이자 장군이었던 부등(?登)이 휘하의 장졸(將卒)들을 이끌고 남쪽의 동진(東晋)을 치던 때였다고 한다. “배고픔을 걱정하지 말라. 곧 배를 채워주겠다”며 독려하면서 사용했던 용어라는 설명이다.


‘다리가 둘인 양’이라는 용어도 있다. 한자로는 兩脚羊(양각양)이라고 적는다. 다리 둘 달린 양은 사실 사람을 가리킨다. 잡아먹는 대상인 사람의 경우다. 아무래도 끔찍하다. 일요일 오전 편안하게 신문을 펼쳐 든 독자들께 이런 일을 소개하는 일이 송구하지만 사실이 사실인 만큼 피할 도리가 없다.


‘菜人(채인)’이라는 단어도 등장한다. 언뜻 보기에는 ‘요리를 하는 사람’ 정도로 풀 수 있다. 그러나 ‘식재료(食材料)’로 시장에 나온 사람을 가리킨다. 명(明)나라 말인 약 372년 전에 나온 이야기다. 당시 허난(河南)과 산둥(山東)에 극심한 가뭄과 함께 메뚜기 떼로 인한 재난, 황재(蝗災)가 들었을 때라고 한다.(『중국식인사(中國食人史)』, 황원슝(黃文雄) 저)


‘다리가 둘인 양’ ‘채인’이라는 용어의 뜻은당시 학자의 말을 인용해 소개한 책 내용에 따르면 “부녀자들과 어린 아이들이 시장에서 팔려 나갔고, 그들을 일컬어 채인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정말이지, 이런 광경을 어떻게 봐야 할까. 넓은 중국의 대지를 넘나들었던 전쟁과 재난의 그림자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중국 문명의 주류를 형성했던 지역의 대표적인 하천인 황하(黃河)의 란저우(蘭州) 구간 모습이다. 극심한 강우량 변동 때문에 문명의 배태와 함께 많은 재난을 불렀던 강이기도 하다.

먼저 주목해야 할 곳은 중국의 문명이 몸체를 이뤘던 곳 황하(黃河)다. 우선 중류와 하류의 강수(降水) 변동률이 문제다. 평균 강수량의 변동을 이야기하는 수치인데, 중국학자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수치는 35%에 이른다고 한다. 유럽의 일반적인 사람 거주지역의 수치는 12.5%다. 이를테면, 중국 황하 중 하류의 강수 변동 폭은 유럽 평균의 3배에 달하는 셈이다.


변동률이 25%에 이르렀을 때는 곡식이 제대로 여물지 못한다고 한다. 40%에 이르면 식량을 아예 거둘 수 없는 정도라고 한다. 그런 가혹한 자연 환경은 먹고 살기 위해 벌이는 전쟁과 동전의 앞뒤를 이뤘을 가능성이 크다. 재해의 위기감이 혹심한 전쟁을 부르면서 서로 순환하는 관계를 형성했을 수도 있다는 얘기다.


기념비적인 저작 하나가 있다. 덩퉈(鄧拓)라는 학자가 1930년대에 펴낸 『중국구황사(中國救荒史)』다. 담담하고 차분하게 적어 내려간 중국 재난의 역사다. 그에 따르면 한(漢)대부터 1936년까지의 2142년 동안 중국의 땅에서 발생한 천연재해의 숫자는 5150회다.


그런 재해의 회오리 속에서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식인의 장면은 결코 낯설지 않았을 테다. 아울러 전쟁은 재해의 폐허를 더 큰 가혹함으로 몰고 갔을 것이다. 앞에서는 중국의 전쟁을 이야기했다. 이제 그 이면을 이루는 중국의 재난을 들여다보자. 깊고 어두운 그늘이다.


유광종 뉴스웍스 콘텐츠연구소장ykj335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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