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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급장 떼고 들어가는 사우나, 평등함이 매력이죠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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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6호 26면

1 굵직한 패턴으로 유명한 마리메꼬 식탁보가 다이닝룸에 펼쳐져 있다.

“이 집에 처음으로 손을 댄 건 4년 전 제 남편이 주한 핀란드 대사로 부임하면서부터예요. 그때부터 조금씩 리모델링 해 나갔죠. 아직 몇 군데 남아있긴 하지만 거의 완성했어요. 곧 떠나려니 너무 서운하네요.”


마띠 헤이모넨 대사와 그의 부인 힐카 헤이모넨의 눈에는 아쉬움이 가득했다. 이들은 북유럽 인테리어에 관심 많은 한국 사람들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집의 천장부터 지하실까지 새 단장을 해왔다. 이제 마무리 단계에 왔는데 어느덧 헤이모넨 대사의 임기가 거의 다 찼다. 부부는 7월 중순에 본국으로 돌아간다.

마띠 헤이모넨 대사와 그의 부인 힐카 헤이모넨.

핀란드 디자인의 최대 강점이 뭐냐고 묻자 대사 부부는 망설임도 없이 ‘실용성’과 ‘기능성’을 꼽았다. 대사관저는 흰 벽면 바탕에 회색·갈색·베이지색의 가구들이 무난하고 세련된 느낌을 주고 있다. 중간 중간에 놓인 독특한 모양의 가구들은 유쾌한 액센트를 찍는다. 프리미엄 라이프스타일 브랜드 ‘이딸라(Iittala)’와 큼직한 원색의 꽃무늬로 유명한 ‘마리메꼬(Marimekko)’, 정겨운 핀란드 국민 캐릭터 ‘무민(Moomin)’, 유명 모바일 게임 ‘앵그리버드(Angry Bird)’등 핀란드를 대표하는 디자인들이 관저를 빛내고 있었다.


헤이모넨 대사는 부인의 인테리어에 대해 “반전(twist) 있는 인테리어”라고 자랑했다. 이것이 같은 북유럽 스타일인 덴마크 대사관저의 인테리어와 닮은 듯 다른 점이다. “저는 핀란드 디자인과 덴마크 디자인을 구별할 수 있어요. 보통 사람들에겐 어려울 수 있지만 제 눈엔 보이거든요. 핀란드 디자이너들은 과감한 실험정신을 펼치기 때문에 항상 그 독특한 무언가가 내재돼 있답니다.” 헤이모넨 대사부인은 핀란드 디자인의 독창성을 강조했다.


핀란드 관저 중에서도 가장 특별한 공간은 지하에 위치한 사우나였다. 대사는 핀란드식 사우나에 대해 “본국에선 모든 집에 설치돼 있을 정도로 뿌리 깊은 역사가 있다”며 “일상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필수 공간”이라고 설명했다. 헤이모넨 대사 부부가 관저의 사우나에 특별히 공을 들이게 된 데는 부인의 영향이 가장 컸다. 그는 전 핀란드사우나협회 상임이사와 국제사우나협회 사무총장을 지냈을 정도로 사우나에 대해 깊은 전문지식을 갖고 있다. 대사 부부는 최소 일주일에 한 번 사우나를 애용한다고 했다.

5 주한 핀란드 대사관저 지하에는 대사 부부가 일주일에 한 번씩 이용한다는 핀란드식 사우나가 있다. 박상문 코리아중앙데일리 기자

핀란드사우나협회에 따르면 인구 약 550만 명의 핀란드엔 무려 320만 개의 사우나가 있다. 일반 가정은 물론 공공장소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아재 문화’로 취급되는 한국과 달리 핀란드에서는 남녀노소 모두가 즐기는 공간이다. 예전 핀란드인들은 날씨가 추운 겨울에는 병원으로 이동하기 힘들어 사우나에서 출산을 하기도 했다. 사우나는 따뜻하고 깨끗한 공간이라는 사회적 인식이 널리 퍼져있다고 한다.


핀란드식 사우나는 몸을 가볍게 씻는 단계부터 시작된다. 섭씨 약 80도에서 100도로 맞춘 사우나 방에 들어가 땀을 흘리며 어린 자작나무 가지로 온 몸을 두들긴다. 혈액순환 증진에 탁월한 효과가 있다고 한다. 난로로 돌무더기를 달구며 온도 조절을 하고 돌에다 뜨거운 물을 부으면서 습도 조절을 한다. 열기가 불편하게 느껴질 무렵 방을 나와 곧바로 샤워를 하거나 차가운 호수에 온 몸을 담근다. 몸을 다 씻고 나서는 갓 구운 소시지를 먹으며 마무리한다.

4 대사 부인이 가장 아낀다는 키르스티 타이비올라가 디자인한 램프 ‘아르’.

헤이모넨 부인은 핀란드 사우나의 최대 매력으로 ‘동행하는 사람들 간의 평등함’을 꼽았다. 열기가 모락모락 피어나는 방에 마주 앉아 있으면 모든 상하관계가 금세 사라진다고 했다.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솔직한 이야기가 오가기 때문이다. 그는 “핀란드에 부임하는 수많은 한국 대사들이 핀란드사우나협회에 가입할 정도로 한국인들도 이 문화에 흠뻑 빠진다”며 “심지어 전 대통령이라 할지라도 사우나 안에서만큼은 모두가 ‘타이틀’을 버린다”고 자부했다.


‘상상력을 자극하는 가구’가 좋다는 부인은 가장 아끼는 소품 중 하나로 현관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나무 재질의 LED 테이플 램프를 꼽았다. 키르스티 타이비올라(Kirsti Taiviola)가 디자인한 ‘아르(Aarre)’다(사진 4). 부인은 이 제품을 ‘매직 램프(magic lamp)’에 비유했다. 천장을 올려다보니 등불의 울퉁불퉁한 표면이 그대로 그림자로 비춰져 있었다.

2 거실엔 북유럽 스타일의 가구들이 독특한 디자인을 자랑한다.

이번엔 거실에 놓인 또 다른 램프를 가리켰다. 일까 수빠넨(Ilkka Suppanen)이라는 디자이너가 제작한 ‘또로(Tollo)’라고 했다. 종이로 된 이 스탠딩 램프(사진 2)는 마치 잎이 쭈글쭈글한 한 송이 꽃 같았다. 핀란드어로 또로는 종이를 둘둘 말아 만든 형상을 일컫는다. 부인은 “집을 방문하는 손님이 한 번씩 의문을 제기하는 가구”라며 “어떤 이들은 야자나무에 비유한다”고 했다. 대사는 “종이가 핀란드의 주요 수출 품목”이라며 “집 안 곳곳에 종이 재질의 커튼도 달아놨다”고 말했다.

거실 천장에 매달린 나무 재질의 접이 의자는 사물리 나만카가 디자인한 ‘이엘라’.

거실 한 가운데에 매달려 있는 나무 재질의 접이 의자 ‘Jiella(이엘라)’는 사물리 나만카(Samuli Naamanka)의 작품이다. 대사는 종종 이 의자에 앉아 독서를 한다. 노곤함에 금방 잠이 들어 책을 끝까지 읽은 적은 없다고 했다. 부인은 웃으며 “모든 방문객들이 한 번씩 앉아보고 싶어하는 의자”라면서 “접어 올릴 수 있다는 특징이 핀란드 가구의 실용성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벽난로 옆 한 쪽 구석에는 핀란드 작가 토베 얀손(Tove Jansson)이 제작한 무민 캐릭터 인형이 자리잡고 있었다. 올해 탄생 71주년을 맞이한 이 하얗고 포동포동한 주인공은 비록 하마처럼 생겼지만 알고 보면 북유럽 설화 속에 등장하는 도깨비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무민 가족의 모습에서 핀란드인들의 일상생활을 엿볼 수 있다. 무민 캐릭터의 표정은 삶의 질을 중시하는 핀란드인들을 상징한다.


핀란드는 2015년 세계경제포럼에서 교육·복지·고용면에서 세계 최고의 인적자원 국가로 선정되었다. 세이브더칠드런(Save the Children)의 조사에서도 엄마가 자녀를 키우기에 가장 좋은 국가 순위에서 지속적으로 상위를 차지해왔다. 세계투명성기구의 국가별 부패지수에서도 핀란드는 매번 세계에서 부패가 적은 국가로 꼽힌다.

3 산업디자인의 거장 이에로 아르니오가 제작한 ‘팔로마’가 야외정원 한 켠을 지키고 있다.

대사에게 관저 안의 소품 중 행복을 가져다 주는 게 뭐냐고 묻자 야외 정원 한 켠을 지키고 있는 커다란 새 모형을 가리켰다. 형태 디자인의 거장 이에로 아르니오(Eero Aarnio)가 낳은 ‘팔로마(Paloma)’라는 작품이었다(사진 3). 컴컴한 밤에 홀로 환히 켜져 있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으면 왠지 모를 행복에 감싸인다고 했다. “밤이 되면 오로지 저것만 보여요. 국내 공공장소에서도 몇 번 마주친 적이 있는데 반갑기도 하고 대사로서 뿌듯하기도 하고 그래요.” 대사는 요즘 대세로 자리잡고 있다는 핀란드 디자인을 자랑하느라 바빴다.


이성은 코리아중앙데일리 기자lee.sunge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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