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모키 화장은 죄가 없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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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5호 29면

SBS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의 이번 주 방송분을 보다가 피식 웃음이 났다. 태조 이성계를 모함하는 홍인방과 길태미, 적룡 세 사람이 한자리에 모여 계략을 짜는 장면이었다. 세 사람의 얼굴이 한 화면에 잡히는데 하나같이 눈가에 짙은 스모키 화장을 했다. 마치 헤비메탈 밴드 멤버들 같다. 사극인데, 그것도 남자 배우들의 눈매를 이렇게 ‘시커멓게’ 칠해놓은 건 왜일까.


길태미 역할을 맡은 박혁권의 진한 눈 화장은 드라마 첫 회부터 단연 화제였다. JTBC 드라마 ‘밀회’에서 속물근성의 찌질한 남편을 연기하면서도 결코 미워할 수 없는 표정 때문에 시청자들로부터 ‘올라프(애니메이션 영화 ’겨울왕국‘의 눈사람)’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그다. 영화나 방송에서 주연 못지않게 시청자들의 눈길을 끌어당기는 ‘신 스틸러’ 중 하나인 그가 이번엔 캐릭터 뿐 아니라 놀랄만한 비주얼로도 히트를 친 것이다. 돈밖에 모르는 ‘허당’ 책사, 그러면서도 ‘고려 제일검’이라는 무시무시한 반전을 보여주는 길태미를 위해 지금껏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스모키 화장을 한 것. 팩트와 픽션의 경계를 넘나드는 팩션물임에도 불구하고 다소 황당한 전개가 불편했지만 그래도 이 드라마를 꾸준히 보고 있는 이유의 8할은 아마도 길태미 얼굴 보는 재미 때문이 아닐까.


뒤이어 나타난 악인 홍인방 역할의 전노민 역시 드라마 처음과는 달리 요즘은 눈두덩이 시커멓다. 극중 초반 성균관 유생을 이끄는 정의로운 사대부로 등장했을 때와 달리 고려를 집어삼키겠다는 야욕에 불타오르면서 그도 스모키 메이크업을 시작한 것이다. 보아하니 횟수가 더할수록 색깔이 더 짙어지는 듯하다. 홍인방에게 온갖 정보를 모아주는 비곡사 주지스님 적룡 역할의 한상진 눈가는 아예 팬더를 방불케 한다.


이들 세 사람의 눈 화장을 보고 있자니 영화 ‘친절한 금자씨’의 대사가 생각난다. 착한여자 금자가 복수를 결심하고 얼굴에 진한 화장을 하자 누군가 그 이유를 물었다. 이때 금자가 대답한다. “착해 보일까봐.”


다시 세 배우의 본래 얼굴을 떠올려봤다. 세 사람 모두 눈 꼬리가 처진 웃는 얼굴이다. 지금까지 역할도 대부분 소시민 또는 선한 캐릭터였다. 이랬던 사람들이 악인을 연기하자니 무언가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을 터. 그게 바로 스모키 화장이다.


그런데 스모키 화장 입장에선 ‘악당의 표식’이라 불리는 것에 억울할 것도 같다. 크리스찬 디올 인터내셔널 프로팀의 손민기 메이크업 아티스트는 “스모키 메이크업은 눈매를 또렷하게 만들어주는 화장법”이라며 “특히 홑꺼풀이면서 눈 꼬리가 처진 동양인들에게 효과적”이라고 설명했다.


색상도 다양하다. 흔히 팬더처럼 눈두덩이 시커먼 화장만 생각하기 쉬운데 그레이와 검정에 어떤 색깔을 섞어주느냐에 따라 때로는 사색적이고 때로는 섹시하게 보인다. 손씨는 “올 가을겨울 스모키 메이크업 트렌드는 그레이+깊이감 있는 블루+와인 빛 섀도의 혼합”이라며 “도시적이고 세련된 이미지의 여성을 표현하는 게 목적”이라고 했다.


그러니 남자들이여, 눈가에 짙게 스모키 화장을 한 여자를 보면 ‘세다’ ‘말 붙이기 어렵다’ ‘나쁜 여자 같다’ 라는 선입견은 갖지 마시길. 그녀는 단지 좀 더 세련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화룡점정’을 했을 뿐이다.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일지니.


글 서정민 기자 meantree@joongang.co.kr, 사진 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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