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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선거로 권력 독점하는 제왕적 대통령제 개선 안 하면 차기 정부도 실패할 수 있어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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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1호 4 면

지난 3일. 서울 광화문에 170만의 촛불이 일어섰다. 촛불은 들불처럼 번지며 전국적으로 232만 명이 거리로 나왔다. 헌정 이래 최다 인원. 8회에 걸친 800만 명의 촛불 시민은 대한민국의 상식을 외쳤다. 최순실 국정 농단 사태와 세월호 진실 규명, 옥시 사태 책임자 처벌 등. 이 시대의 수많은 ‘미생’과 ‘을(乙)’들은 기성정치의 퇴출을 요구했다. 결국 박근혜 대통령의 국회 탄핵을 이끌어냈다. “이게 나라냐”는 함성은 사회구조의 근본적인 변화를 바라는 목소리였다.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는 “촛불 민심은 박근혜 대통령의 퇴진을 넘어 대한민국의 리셋(reset)과 리뉴얼(renewal)이라는 혁명적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22일 정치권과 전문가들이 모여 촛불 민심이 던진 숙제를 어떻게 풀 것인가를 두고 머리를 맞댔다. 서울 여의도 중소기업중앙회에서 열린 ‘보수·진보 특별토론회’에서다. 이날 토론회에는 대권 도전에 나선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상임고문과 안철수 전 국민의당 상임공동대표, 남경필 경기지사, 손학규 전 민주당 상임고문이 참석했다. 또 김호기 교수와 조장옥(한국경제학회 회장) 서강대 경제학과 교수, 이달곤(전 행정안전부 장관) 가천대 행정학과 교수, 김상조(경제개혁연대 소장) 한성대 무역학과 교수가 앞으로의 비전을 나눴다. 토론회는 국가미래연구원과 경제개혁연구소·경제개혁연대가 주최하고 중앙일보·한겨레·중소기업중앙회가 후원했다.

참석자들은 경제난과 소득 불평등이 촛불집회가 벌어진 근본적인 배경이라는 데 공감했다. 경기 침체가 서민들의 삶을 억누르는 가운데 사회 고위층의 특혜와 불합리한 국정 운영이 기득권에 대한 분노로 표출됐다는 설명이다.


발제자로 나선 김호기 교수는 “20대는 등록금과 청년실업, 30대는 고용불안정·보육·주거, 40대는 퇴출의 공포와 교육·노후, 50대 이상은 일자리·건강·노후 걱정 등 모든 세대가 경제적 위기에 몰렸다”며 현재 한국을 ‘불안’ 사회로 규정했다. 이어 “경쟁 지상주의와 경제 양극화, 줄 세우기 문화는 개인을 좌절·불안에 빠뜨려 분노를 유발한다. 견고해지는 부의 세습화가 상대적 박탈감을 키웠다”고 설명했다. 승자와 패자, 엘리트와 잉여, 금수저와 흙수저 등으로 대표되는 현대사회의 계급화가 궁지에 몰린 사람들의 분노를 키워왔다는 것이다.


조 교수 역시 “현재 한국의 모든 불안과 갈등 요인은 저성장에 빠진 경제”라며 “앞으로 저성장은 불가피하기 때문에 사회문제는 더욱 증폭될 가능성이 높다”고 내다봤다. 그러면서 “어느 자본주의 사회든 불평등은 상시화된 사회문제다. 정치권의 지나친 양극화 언급은 자기 편을 늘리려는 계책에 불과하다”며 “우리의 숙제는 남성과 여성, 가계와 기업,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에 양극화를 어디까지 허용할 것인지 논의하는 일”이라고 당부했다.

원인 분석에서는 큰 시각차가 없었지만 해결 방안을 두고 학자들 간에 이견을 드러냈다. 예산의 지출 방식 등 미시적으로 풀어나갈지, 경제정책 기조를 바꿔야 할지, 공동체 사회를 복원할지를 둘러싸고 고민의 층위와 시각이 각기 달랐다.


조 교수는 “당장 경제성장률을 방어하는 일이 먼저”라며 국가 재정을 건전화하고 과세·지출·복지정책을 재설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기관리정책을 통한 잠재성장률 제고 등도 해법으로 제시했다. 성장전략을 통해 세수와 일자리를 늘리면 복지와 가계소득 증대를 동시에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성장 없이 복지를 할 수 있다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이라며 “고령화 문제 해소를 목표로 한 최근 정부의 경제정책은 다소 지나치다. 정규직에 대한 과잉대우를 없애 비정규직 임금을 높이고 출산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정부의 시장 개입을 축소함으로써 시장 기능을 복원하고 기회의 균등, 정부의 교육·노동·금융 정책 일관성도 강조했다.


그러나 김상조 교수는 이런 접근이 자칫 성장이 먼저냐, 복지가 먼저냐는 해묵은 논쟁으로 번질 수 있다는 점을 경계했다. 김 교수는 정부·기업이 주도하는 성장 방식에서 대기업의 이익을 가계로 나눠 낙수효과와 소득 주도 성장을 동시에 추구하는 성장 방식의 패러다임 변화를 촉구했다.


김 교수는 “세계적인 불황과 보호무역 기조로 수출·투자 중심의 성장 방식이 한계를 드러냈음에도 개발연대의 방식에 집착하고 있다”며 “중국 시진핑 국가주석이 내수 주도로 성장전략을 전환한 점은 시사점이 크다. 재벌의 성과를 경제 전체로 확산시키는 톱다운(하향식) 경제민주화와 가계의 소득·소비를 진작하는 바텀업(상향식) 성장을 결합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그는 구체적으로 27개 대기업집단으로의 경제력 집중을 억제하는 한편 대기업의 규율 체계를 공정거래법에서 상법으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개정 상법은 오너 일가의 영향력을 줄이고 주주와 사외이사·기관투자가의 권리·권한을 확대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또 발주사의 단가 후려치기 등 갑질 행위를 봉쇄하기 위한 하도급 공정화 대책을 비롯해 증권사 등 금산결합그룹에 대한 통합감독체계 적용, 노동자의 경영참여 등을 제시했다. 이런 경제민주화 정책을 통해 대기업의 부가 가계로 흘러가면 내수 시장이 확대될 수 있다는 게 김 교수의 분석이다.


김 교수는 “재벌 자원의 확산을 통해 다수 대중의 구매력을 끌어올려 소비와 내수를 진작시키는 것이 유일한 생존 방법”이라며 “1997년 외환위기 당시 문제와 답을 다 알고 있었음에도 의사결정 매커니즘이 붕괴돼 침몰할 수밖에 없었다. 온탕 속 개구리에 머물 것인가”라고 강조했다.


김호기 교수는 복지 확대를 통한 사회안전망 구축을 해결책으로 제시했다. 김 교수는 한국의 사회적 만족감과 공동체 인식이 바닥에 떨어졌다는 점을 거론하며 “한국은 한번 실패하면 다시 회복하기 어려운 사회다. 복지제도를 확충하는 한편 대학입시 제도를 뜯어고치고 공정한 법 집행, 부정부패 해소 등을 이뤄야 한다”고 주장했다. 생활이 안정되고 학교·직장에서 과도한 경쟁이 줄면 사회적으로 여유가 생겨 개개인의 만족·행복감이 고취될 것이란 설명이다.


다만 정치 제도가 고장 난 상황에서 이런 정책적 변화를 시도할 수 있겠느냐는 근본적인 질문이 제기됐다. 정치지형은 51대 49로 굳어졌음에도 한 번의 선거로 권력을 독점하는 제왕적 대통령제가 사회제도 개선과 협의를 가로막을 것이란 문제 제기다.


김상조 교수는 “저성장에서 허우적대는 2017년과 경제적 윤택함 속에 설립한 ‘87년 체제’의 의사결정 구조는 맞지 않는다”며 “어떤 세력도 자신의 의도를 관철할 헤게모니가 없으면서 언제든지 좌절시킬 수 있는 비토 파워만 넘치고 있다. 차기 정부도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다.


이달곤 교수도 “양극단에 치우진 집단이 서로를 자극하는 정치문화로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다”며 현재 상황을 ‘비토크라시(Vetocracy·거부권 정치)’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정치권이 상대방의 정책을 무조건 거부하기 때문에 어떤 정책도 나올 수 없다는 얘기다. 탄핵 정국과 국가 개조를 위해 개헌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결국 토론의 중심은 정치권으로 넘어갔다. 이날 토론회에 참석한 대선주자 가운데 안철수 전 대표, 남경필 지사는 대선 후 개헌을 추진하겠다는 입장을, 손학규 전 상임고문은 당장 개헌을 추진해야 한다는 입장을 드러냈다. 문재인 상임고문은 특별한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안 전 대표는 “대선 전 개헌은 반대지만 개헌은 해야 한다”며 “각 주자가 대선 공약으로 내걸고 2018년 지방선거 때 함께 투표하는 것이 실행 가능한 합리적인 방안”이라고 말했다. 남 지사도 “시대정신은 권력과 부의 공유”라며 “권력과 부의 공유를 완결하는 것은 개헌”이라고 말했다. 개헌을 둘러싼 논의가 공전하자 현재로서는 타협 가능한 ‘협치’로 논의의 초점이 모였다. 여야가 공동 정부를 꾸려 권력을 나누고 협치는 제로섬 게임의 폐해를 막아 민의를 보다 더 잘 반영할 수 있다. 협치를 처음 제시한 남 지사는 구체적으로 ‘연정(聯政)론’을 들고 나왔다. 그는 게르하르트 슈뢰더와 앙겔라 메르켈 독일 전·현직 총리의 대연정을 예로 들면서 “진짜 협치를 하려면 권력을 공유해야 한다. 누가 집권하든 집권하는 사람이 예산·인사권의 30% 정도를 주면서 연정을 하겠다는 약속을 하자”고 제안했다.


문 상임고문도 “기존의 진보-보수 프레임을 넘어설 수 있는 협력의 지평을 열어야 한다”며 남 지사의 연정 제안에 대해 “저도 협력정치를 말씀드렸다”고 답했다. 안 전 대표는 “대통령 당선자가 경쟁 상대 캠프에 있던 분도 좋은 인재면 데려와야 한다”며 정책 차원의 연정에 대해서는 동의했다. 다만 손 전 상임고문은 “김대중 대통령 당시 DJP연정이 있었지만 2년 만에 파탄이 났다”며 “개인이 협치를 약속한다고 국정이 그대로 흘러가진 않는다”고 말했다.


조기 대선 후 안정적인 국정 운영을 위한 ‘섀도 캐비닛’에 대해서도 논의가 오갔다. 섀도 캐비닛은 정권 획득에 대비해 미리 준비해 두는 내각을 말한다. 헌법재판소가 박 대통령의 탄핵소추안을 인용할 경우 인수위원회 없이 바로 대선과 내각 구성이 이뤄지기 때문에 섀도 캐비닛의 필요성이 언급돼 왔다. 대선주자 중에서는 문 상임고문이 처음 말을 꺼냈다.

이달곤 교수는 “유권자 역시 후보를 검증할 시간이 부족하기 때문에 후보 주변 사람의 명단을 드러내면서 집권 후 역량을 판단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며 동조했다. 이에 대해 안 전 대표는 “현행 선거법상으로 자칫 매수죄에 해당될 수 있고, 박근혜 정부처럼 당선자가 본인 선거를 도와준 구성원만 중용하게 되는 단점이 있다”고 비판했다. 손 전 상임고문도 “현재와 같은 상황에서 제대로 내놓을 수 있을까 의문”이라며 “공약을 바탕으로 대통령을 선출해야 한다”고 말했다. 남 지사는 “자기 세력이나 당 세력을 갖고 섀도 캐비닛을 짜기보다 치열한 토론을 거쳐 국가 전체의 섀도 캐비닛을 꾸려야 한다”고 했다.


한편 김광두(서강대 석좌교수) 국가미래연구원장이 공통 질문으로 던진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 체계 배치 문제에 대해선 참석한 모든 대선주자들이 대체로 부정적인 입장을 피력했다.


문 상임고문은 “사드 문제는 다음 정부에서 논의하자는 입장에 변화가 없다”고 말했고, 안 전 대표는 “사드 처리 과정에서 중국의 협조를 구하지 않으면서 외교적 혼란을 초래했다. 새 리더십이 세워지면 그 상황에서 국익을 위해 결정해야 한다”고 했다. 손 전 상임고문과 남 지사도 “국회 내 논의를 거쳤어야 했다” “중국의 우려를 불식시킬 수 있는 조치를 미국과 합의해야 한다”며 대책 마련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김유경·함승민 기자 neo3@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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