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교 위기 고흥영주고, 교장 또래 신입생 10명이 살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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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고흥평생교육관(중학 과정)에 다니는 50~60대 만학도들이 내년 3월 입학하는 고흥영주고등학교를 21일 방문했다. 이들은 이강선 교장(앞줄 오른쪽)과 함께 수업 예행연습을 했다. 초등학교 졸업 후 수십 년 만에 정규 학교 걸상에 앉아 본 이들은 “고교 생활이 무척 기대된다”며 활짝 웃었다. [고흥=프리랜서 장정필]

전남 고흥평생교육관(중학 과정)에 다니는 50~60대 만학도들이 내년 3월 입학하는 고흥영주고등학교를 21일 방문했다. 이들은 이강선 교장(앞줄 오른쪽)과 함께 수업 예행연습을 했다. 초등학교 졸업 후 수십 년 만에 정규 학교 걸상에 앉아 본 이들은 “고교 생활이 무척 기대된다”며 활짝 웃었다. [고흥=프리랜서 장정필]

전남 고흥군 과역면의 작은 시골 학교인 고흥영주고등학교 구성원들은 지난 9월 눈앞이 캄캄해졌다. 내년에 이 학교에 들어오겠다는 신입생이 학급 편성 최소 인정 기준(15명)에도 미치지 못해서다. 1968년 개교 후 50년 가까운 역사가 끊기고 폐교까지 우려되는 상황에 교사들과 교장은 물론 학생들도 걱정이 커졌다.

내년 학급 최소 기준 15명 못 채우자
주민들, 48년 전통 학교 구하기 나서
“손주뻘 학생 피해 줄까 고민되지만
영어·국어·컴퓨터 열심히 배울 것”
교장 “농사 바빠도 출석 뒤 조퇴를”

이강선(59) 교장을 비롯한 교직원들은 신입생 유치를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마땅한 방법이 없었다. 저출산과 도시로의 인구 유출 등 농촌 고령화의 어쩔 수 없는 결과였다. 이대로라면 학교가 문을 닫는 건 시간문제였다. 고흥영주고의 학생 수는 계속 줄어 2010년 1~3학년 전체 102명에서 현재 32명이다. 1학년 17명, 3학년 15명이다. 2학년은 단 1명도 없다. 비슷한 처지의 전남 지역 내 각급 학교가 통폐합되고 있어 고흥영주고의 위기감은 더했다. 전남 지역에서는 2012년부터 내년까지 초등학교 9곳, 중학교 4곳, 고등학교 14곳 등 모두 27곳의 학교가 통폐합됐거나 예정돼 있다.

희망의 소식이 들려온 건 지난 10월 무렵이다. 고흥평생교육관에서 중학 학력 인정 과정을 마치고 내년 2월 졸업 예정인 ‘학생’들이 있다는 반가운 소식이었다. 50년생부터 63년생까지의 만학도들이었다. 평균 연령은 59.7세로 이 교장과 같은 나이였다. 부부 사이도 있었다.

이 교장과 교사들은 고흥평생교육관으로 달려갔다. 김동월(58)씨를 비롯한 졸업 예정 남녀 학생 10명을 신입생으로 입학시키기 위해서다. 설명회를 열어 학교를 자랑했다. 김씨 등은 주 5일, 3년간 꼬박꼬박 학교에 나가기 어려워 대안학교 진학을 고민하던 차였다. 김씨 등의 마음이 움직였다. ‘기왕에 시작한 공부를 제대로 한번 해보자’는 생각에서다. 중학 학력 인정 과정에 참여하며 느낀 성취감도 작용했다. 무엇보다 내 고장의 학교가 사라진다는 게 안타까웠다.

평생교육관 학생 10명 중 1명을 제외한 9명이 입학원서를 냈다. 이 소식을 들은 또 다른 60대 주민 1명도 고흥영주고에 다니기로 했다. 이들은 손주뻘인 현 고흥 지역 중학교 3학년 학생 4명, 다시 공부하려고 재입학을 결정한 2명 등 6명과 함께 내년 3월 신입생으로 입학한다. 모두 16명이다. 학급 편성 최소 인정 기준 을 간신히 넘기며 폐교 위기를 벗어났다.

고민 끝에 입학을 결정했지만 걱정거리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우선 농사·고기잡이·장사 등 생업에 종사하고 있어서 결석을 하지 않고 꾸준히 학교에 나올 수 있을지 걱정이다. 많게는 50세 이상 차이가 나는 학생들과 수업을 잘할 수 있을까, 학업 분위기를 망쳐 피해를 주지 않을까 우려되기도 한다. 숙제를 제대로 해올 수 있을지도 고민거리다.

그러면서도 배움에 대한 의지를 나타냈다. 김씨 등은 이 교장과 만나 저마다 배우고 싶은 과목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이들은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영어·국어·컴퓨터 등의 과목을 선호했다.

학교 측도 맞춤형 수업을 진행하기로 했다. 해외여행을 가면 쓸 수 있도록 회화 위주의 영어 교육을, 책·신문을 읽는 데 도움이 되는 국어 교육을 하기로 했다. 컴퓨터 교육은 인터넷 사용법을 위주로 가르칠 예정이다. ‘교복을 입어보고 싶다’는 김씨 등의 소원에 따라 교실에 4~5벌의 교복을 걸어두기로 했다. 학교 측은 출석도 최대한 배려할 계획이다. 다만 학년 진급과 졸업을 위해 결석은 일반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60일 이내만 허락하기로 했다.

이 교장은 “농사일을 해야 한다면 일단 학교에 출석한 뒤 조퇴를 신청할 경우 가급적 허락하겠다”고 예비 신입생들에게 말했다. 김씨 등은 “학교에서는 공부에 집중할 테니 숙제는 가급적 내지 말아 달라”며 농담 섞인 요청을 하고 있다. 입학을 앞둔 정흥술(65)·선춘방(56)씨 부부는 “고추·양파 농사도 지어야 하고 고기잡이도 해야 하지만 고교 공부에도 소홀하지 않기 위해 매일 함께 등교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교장은 “예비 신입생들의 의지가 대단하다”며 “일반 학생들에게도 긍정적인 영향을 줄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다.

고흥=김호 기자 kimh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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