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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The New York Times

한국 드라마가 북한을 변화시킨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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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백지은 북한인권운동가

백지은
북한인권운동가

지난여름 탈북자들의 한국 적응을 돕기 위한 수업을 막 끝내고 한 탈북 청소년과 아침식사를 함께 했다. 가난한 고아였던 소년은 북·중 접경지역에 살면서 겨울이 오면 얼어붙은 두만강을 건너 외국산 물자들을 밀수해 돈을 벌었다. 여성용 스타킹에 돈을 넣은 뒤 강폭이 좁아지는 곳에서 반대편으로 던지면, 그곳에서 기다리던 중국인이 현금을 받고 스타킹에 한류 드라마를 담은 DVD를 넣어 다시 던져줬다.

북한 장마당, 한류 콘텐트 천지
방송 하루 만에 북한서 유통돼
드라마 본 주민들 의식도 급변
한류 유입 늘려 변화 촉진해야

북한에서는 당국 허가를 받지 않은 주민이 외국산 물자를 소유하면 국사범이 된다. 정치범 수용소에 투옥되는 것부터 사형에 이르기까지 엄격한 처벌을 받게 된다. 그래도 북한 주민들의 해외 콘텐트 소비는 빠르게 늘고 있다.

한국에서 제작된 TV 드라마와 영화·라디오 프로그램은 북한 주민이 바깥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되고 있다. 김정은 정권에 대한 생각까지 뒤바꾸는 힘이 있다. 탈북자들을 인터뷰해 보면 한류 콘텐트가 북한 주민들에게 새롭고 주체적인 사고를 유도하면서 김정은 정권에 대한 의심의 씨앗을 심어주고 있다는 정황이 명확해진다.

외국산 미디어만으로 북한을 급변시킬 수는 없겠지만 주민들의 의식에 점진적 변화를 가져온다는 점에서 희망이 생긴다. 냉전 시절 미국은 소련 시민을 겨냥한 정보 유입 프로그램을 후원했다. 소련 내부의 자유화를 향한 열망을 높이기 위해서였다. 워싱턴은 소련에서 서방으로 망명한 이들의 도움 아래 모스크바가 금지해 온 라디오 프로그램과 잡지를 소련 사회에 몰래 유통시켰다.

효과는 컸다. 소련 주민들에게 뿌려진 미국산 콘텐트는 공산주의가 우월하다는 크렘린의 선전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북한에 대한 한류 콘텐트 살포도 비슷한 효과를 거둘 수 있다. 북한의 지하경제는 수백만 명이 아사한 1990년대 말 ‘고난의 행군’에 뿌리를 두고 있다. 당시 북한 당국의 물자 배급은 주민의 수요에 턱없이 모자랐다. 주민들은 불법 암거래 시장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북한 주민의 3분의 2가 장마당에서 식량과 생필품을 구한다. 해외 콘텐트도 유통된다. 초기 시장경제가 북한에 뿌리내린 것이다.

드론과 DVD, 헬륨이 들어간 풍선, 대북 전단지를 통해 ‘은둔의 왕국’에 한국 콘텐트가 급속도로 퍼지고 있다. 북한은 암거래 네트워크가 잘 발달돼 있어 일부 지역에선 서울에서 방송된 한국 드라마를 24시간 만에 받아보고 있다.

북한 무산에서 탈북한 24세 여성은 북한에서 살던 시절 한류 드라마 광팬이었다고 밝혔다. 그는 “교과서에선 한국 사람들이 너무 가난해 옷조차 못 입고 거리를 돌아다니며 굶주림에 시달린다고 배웠는데 한국 영화를 보니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선생님들이 거짓을 가르쳤다는 걸 깨달았다”고 말했다.

탈북자와 인터뷰해 보면 북한은 지금 상당한 정치·사회적 변화를 겪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서울 사람 말투를 흉내 내거나 당국이 금지한 헤어스타일을 하고 한국 연예인의 옷차림을 따라 입는 주민들이 늘고 있다. 장마당 등장 이후 태어난 젊은 세대들이 한국이나 미국 영화에 나오는 서구식 데이트를 즐기기 시작했다는 보도도 있다. 남녀는 서로 낯을 가려야 한다는 북한의 유교적 규범을 거부하는 것이다.

북한 권부에 대한 주민의 인식도 변화 조짐이 뚜렷하다. 김정은 체제에 대한 불만이 늘고 있다는 보도도 나온다. 행정당국에 대한 불신도 나날이 높아지는 추세다. 특히 90년대 고난의 행군 당시나 그 뒤 태어난 세대는 먹거리와 생필품을 평양 정권의 배급에 전혀 의존하지 않는다. 이들 젊은이는 당국의 배급카드를 받아 교복을 사는 대신 어머니에게 “돈을 달라”고 요구해 장마당에서 교복을 구하는 걸 당연시한다.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는 북한 주민들의 의식을 변화시켜 정권이 압박감을 느끼게 더 많은 정보와 콘텐트를 북한 내부에 유통시켜야 한다. 탈북자들이 중심이 된 북한 인권단체에 예산을 지원해 북한에 유통시킬 오디오·동영상 프로그램을 제작하도록 하는 게 좋다. 위성 전화나 저비용 드론 등 한국과 서방의 정보를 북한 내에 확산시킬 수 있는 혁신적 기술을 유능한 기업들과 함께 개발하는 것도 추천할 만하다. 저널리스트의 자질을 갖춘 탈북자들을 지원해 북한에 보내는 정보의 질과 양을 개선하는 방안도 있다.

북한에서 컴퓨터공학 교수로 재직하다 탈북해 지금은 북한에 정보를 유포시키는 인권단체의 하나인 ‘북한지식인연대’에서 활동하는 김흥광씨는 북한 주민들이 처음으로 외국 라디오 프로그램을 듣게 되면 어떤 기분을 느끼게 되는지 얘기해 주었다.

“‘여기가 지상천국’이라는 평양 정권의 선전선동만 듣다가 외국 라디오를 통해 처음으로 북한의 참상을 알게 되면 엄청난 혼란에 휩싸이며 충격을 받게 된다. 하지만 들으면 들을수록 자신도 모르게 마음을 열고 진실을 받아들이게 된다.”

백지은 북한인권운동가

◆원문은 중앙일보 전재계약 뉴욕타임스 신디케이트 13일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