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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를 영화로 배웠네-시즌2] 연애, '올해도 글렀어'라는 당신에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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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이 정신없이 지나갑니다. 싸늘한 바람을 맞으며 거리를 걷다 혁오밴드의 연말 콘서트 제목에 울 뻔 했습니다. ‘올해는 글렀어.’ 나를 위해 준비한 공연인가 싶었는데, 이미 전석 매진이라니 위안이 되네요. 다들 그러신가요. 올해의 연애 역시 망한 건가요. 연일 빵빵 터지는 빅뉴스를 보면서도 이런 생각을 합니다. 다들 나라 망치느라 바쁜 와중에도 참으로 부지런히 외모도 가꾸시고, 썸도 타시고, 결혼도, 출산도, 이혼도 잘 하셨구나. 국정을 농단하느라 분주했던 것도 아닌데 나는 대체 이 한 해 무엇을 했던건가. 자괴감이 깊어갑니다.

이렇게 만나서

이렇게 만나서

이런 시절이면 찾아보는 영화가 있습니다. ‘500일의 썸머'입니다. 이 영화는 얼핏 보면 ‘나쁜 여자’를 만난 순수한 남자의 수난기인데, 그리 단순하진 않습니다. 주인공 톰은 회사에서 만난 썸머라는 여성에게 첫눈에게 반해 그녀를 ‘운명의 상대’로 믿고 조심조심 다가갑니다. 하지만 썸머는 그의 호감을 즐기고 적극적으로 관계를 발전시켜나가면서도, ”구속받고 싶지 않다“고 말하지요. 사랑이 막 시작될 무렵 두 사람이 술집에서 나누는 대화는 사랑을 대하는 두가지 태도와, 그리하여 이 연애가 순탄하게 흘러가지 않을 것임을 예고합니다.

썸머 : 누구의 여자친구가 되는 건 불편해요. 남녀가 만나면 누군가 상처를 입죠. 결혼해도 열에 아홉은 이혼해요. 우리 부모님처럼.

톰 : 당신이 틀렸어요. 언젠가 알게 될 거에요. 그걸(사랑을) 느꼈을 때.

이렇게 다가가고

이렇게 다가가고

영화는 톰의 시선으로 진행됩니다. 톰에게 썸머는 종잡을 수 없고, 자유로우며, 그리하여 늘 그를 불안하게 하는 여자입니다. 그런 면이 그를 더 깊이 빠져들게 하지만, 역시 예상대로, 그는 지치고 맙니다. 불안정한 연애의 중간 지점에서 한번쯤 주고받기 마련인 그 질문, ”나는, 과연, 너의, 무엇이냐” 문제로 대판 싸운 날 썸머는 비를 맞으며 밤길을 달려와 화해를 시도하죠. 그러면서도 톰이 “네가 어느날 나를 훌쩍 떠나버릴까 두려워”라고 고백하자 단호하게 말합니다. “그건 약속할 수 없어. 왜냐면 누구도 알 수 없거든.”

요렇게 가까워져

요렇게 가까워져

당신은 어느 쪽인가요. 하늘이 점지해 놓은 그 누구를 기다리는 톰인가요? 아니면 그런 환상은 종량제봉투에 담아 버리자고, 지금 서로 즐거우면 그만 아니냐고 생각하는 썸머인가요. 저도 종종 생각해봅니다만, 답을 잘 모르겠습니다. 현실은 이렇습니다. 어떤 상황에서, 어떤 상대를 만나느냐에 따라 때론 쿨방망이 백개 장착한 현실주의자가 되었다가, 어떨때는 지고지순 하늘의 뜻을 갈구하는 운명론자가 됩니다. 왜일까요. 매력의 문제일까요 권력의 문제일까요. 그도 아니면 호르몬 문제일까요. 이 우울한 계절에 '500일의 썸머'를 다시 돌려보는 이유는 이 영화가 바로 그 사랑의 불가해함. '모르겠다 젠장 모르겠어'를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이토록 달달했으나

이토록 달달했으나

이야기는 이렇게 흘러갑니다. 그렇게도 쿨하던 썸머는 톰을 떠난 후 얼마 지나지도 않아 다른 남자와 결혼을 합니다. "그녀만이 나를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며 지지리궁상을 떨던 우리의 톰은 직장을 옮기고, 현실과 마주하며 차츰 생각을 정리해 가죠. 그리하여 다시 만났을 때, 톰은 썸머에게 말합니다. "운명이란 없다는 걸 이제야 알게 됐다"고요.

톰 : 운명이니 반쪽이니 진정한 사랑 같은거 동화 속에나 나오는 새빨간 거짓말이었어. 네 말을 들을 걸 그랬어.

썸머 : (지긋이 톰을 바라보며) 아냐. 네가 맞았어. 어느날 식당에서 책을 읽고 있는데 어떤 남자가 다가와 책 내용을 물었어. 그 사람이 지금 내 남편이야. 혹시 내가 다른 카페에 들어갔다면? 10분만 늦게 카페에 도착했다면? 결국 우린 만날 운명이었던 거야. 그 때 생각했지. 네 말이 옳았구나.

이건 뭔가요. 그 짧은 사이 썸머는 운명론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뚜렷한 이유는 알 수 없습니다. 그냥 "너를 만날 때 모르던 걸 어느날 알게 됐다"고 합니다. 그리고 쐐기를 박는 한 마디를 남깁니다. "누구에게도 잘못은 없어. 단지 내가 너의 반쪽이 아니었던 거야."

결국 이렇게 싸우다

결국 이렇게 싸우다

비교적 최근에 했던 두 번의 연애를 돌아봅니다. 저 역시 한번은 썸머였고, 한번은 톰이었네요. 운명·인연·약속·영원 같은 단어를 즐겨쓰던 A 앞에선 가차없는 회의론자가 되었었죠. ”너는 나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사랑에 빠진 너 자신을 사랑하고 있어“라는, 말이되는것같기도아닌것같기도한, 주로 상대의 과도한 열정이 부담스러울때 사용하는 이 문장을 내뱉으면서 말이죠. ”너를 좋아하지만 아직 준비가 안 됐어“라는, 역시 말이되는것같기도아닌것같기도한 대사를 읊으며 도망치던 B 앞에서는 왜 또 그리 톰스러웠는지. 담담한 척 하며 “괜찮아. 기다릴께”라고 했던 나의 입을 박음질과 공그르기로 꿰매버리고 싶군요.

또 하나의 사랑을 보내는군요

또 하나의 사랑을 보내는군요

이런저런 이유로, 때론 이유도 모른채 썸머와 톰을 오가며 우리는 지난한 연애의 날들을 넘어갑니다. 이 불가해함에 질려 다신 연애같은 건 하고 싶지 않다 생각하지만 어느샌가 또 '1일'을 시작합니다. '500일의 썸머'의 마지막, 톰은 새로운 여인 '어텀'을 만납니다. 여름(썸머)이 가고 가을(어텀)이 온 거죠. 이 연애에서는 누가 톰이, 누가 썸머가 될까요. 그렇게 계속 엇갈리며 가다보면 같은 지점에 멈춰 오랜 계절을 함께 할 누군가를 만날 수는 있을까요.

분명한 건 올해는 글렀다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잘못은 아닙니다. 사랑이 원래 그런 것이니까요.

새해는 오고, 이러니저러니해도 우린 또 누군가를 만나 연애를 하게 될 것입니다(그렇게 믿읍시다). 아무쪼록 내년엔, 코스모스의 기운이 당신과 함께 하시기를.

또혹시나하는 기자 serendipity@joongang.co.k*r

**‘연애를 OO으로 배웠네’ 는?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들이 다양한 문화콘텐트에 연애 경험담을 엮어 연재하는 잡글입니다. 잡글이라 함은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기자 이름과 e메일 주소는 글 내용에 맞춰 허구로 만든 것이며 익명으로 연재합니다. 연애 좀비가 사랑꾼이 되는 그날까지 매주 금요일 업데이트합니다. 많은 의견과 성원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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