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로 물러나는 대통령|이창국 <중앙대 사대교수·영문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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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전두환대통령은 우리나라 헌정사상 헌법에 규정된 대로 임기의 만료와 함께 그 직을 떠나는 최초의 대통령이 될 것이다.
그동안 헌법이란 것이 대통령의 의사에 따라 편리한대로 개정되는 사실을 보아왔던 우리 국민들은 이제 비로소 한 공직자의 약속이 실행에 옮겨지는 것을 희망과 기대를 가지고 지켜보게 되었다.
내가 현재 홍미를 느끼는 것은 전두환대통령이 대통령직을 떠난 후 과연 어떤 일을 하게 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어느 대학의 총장? 어느 대학의 정치학교수? 순회대사? 어느 큰 재벌기업의 명예회장? 그가 원하기만 한다면 그는 이들 가운데 어느 것이라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선례가 없고 또 우리나라의 현재의 정치적, 그리고 사회적 풍토에서 그런 일을 하게 될 가능성은 지극히 희박하다고 보여진다.
그렇다고해서 그가 시골로 은퇴하여 낙시질이나 하면서 평화롭고 한가하게 그의 여생을 보내리라고는 여겨지지 않는데 그 이유는 한마디로 그러기에는 너무 젊은 나이이며 또한 원기왕성하게 일하고 싶어하는 사람으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그는 대통령직을 내어놓는 해에 57세가 되며, 아주 건강한 분이다. 그는 서울에 살면서 여전히 분주한 생활을 할 것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과연 전대통령이 하고 싶어하는, 또 할 수 있는 일은 과연 어떤 것일까.
전직이 대통령이었던 사람이 대통령이었을 때와 같은 정열과 헌신, 그리고 열성을 쏟아부을 그런 일은 없다고 본다. 대통령의 직은 하루 24시간 근무하는 직업이다.
미국의 「로널드·레이건」대통령은 1981년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 자기는 결코 재선을 도모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였다. 무엇보다도 자신이 고령이었음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4년후 또 출마하여 재선되었으며 지금 그는 피로한 기색이나 싫증을 나타냄이 없이 오히려 더 그 자리를 즐기고 있는 것 같다. 그의 현재 나이 75세.
필리핀의 전 대통령이었던 「마르코스」는 그의 자리에서 축출되기까지 약 20여년 동안 대통령자리를 고수하였다. 그는 극도로 악화되어가는 건강과 노령, 그리고 국내외로부터의 나날이 가중되는 비난과 압력에도 불구하고 마지막으로 쫓겨나는 그날 그순간까지 그 자리를 떠나겠다는 어떤 종류의 의사표시도 없었다.
축출될 당시 그의 나이는 69세였다.
대통령의 자리를 떠난다는 것이 편지하나 부치고 우체국을 나서는 것처럼 쉬운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참으로 순진한 사람이다.
대통령으로서 정상에 있으면서 정상이 필연적으로 가져다주는 모든 흥분과 스릴, 그리고 여기에 부수되는 특권과 자부심에 지금까지 흠뻑 빠져있다가 이제부터 하산의 길에 들어선다고 생각하여 보라. 순간 삶의 의미가 송두리째 사라질 수 있는 것이다. 대통령 노릇을 해보지 못한 사람들은 이 대통령직이 가져다 주는 매력과 보람, 성취감, 그리고 순간순간마다 역사적인 사건을 결정하고 국가적인, 그리고 국제적인 사건의 핵심 속에 서 있을 수 있는 그 전율적인 스릴은 아마 모를 것이다.
대통령은 그가 누리고 행사하는 권력때문에 필연적으로 비난을 받는다. 그러나 우리는 너나 할것없이 모두 크건작건 권력을 누리고 싶어하며 행사하고 싶어한다. 대통령의 경우에 문제가 되는점은 그가 그 권력중에서도 가장 큰 것, 가장 센 것, 가장 좋은 것에 노출된다는 사실이다. 그가 이 습관을 떼어버리려할 때 그는 보통 이상의 댓가를 지불해야만 되는 것이다.
자리를 떠난다는 것은 그 자리가 크고 작고를 불문하고 당사자에게는 힘겨운 일이다. 그가 일하는 동안 성공을 거두었을 때 그는 그 일을 더 계속하고 싶을 것이며,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떠나기 보다는 잘 할때까지 더 해보고 싶어지는 법이다. 더군다나 그 일이 보통 일이 아니고 청와대나 백악관에서 하는 일일 때에는 더욱 그렇다. 한마디로 말해서 대통령이 그 직에서 물러나 만족할 수 있는 또 다른 직장은 없다. 애석한 일이다.
그런데 태평양을 건너 있는 나라에서 최근에 있었던 일이 희망의 빛을 던져 주고 있다.
미국의 제39대 대통령이었던 「지미·카터」씨의 경우는 너무 오래전에 있었던 일도 아니고, 우리와는 너무 동떨어진 어느 성자의 경우가 아니기에 우리가 이런 경우에 참고하기엔 아주 알맞다. 「카터」대통령이 「레이건」 현 대통령에게 재선에서 패하였을 때 그의 나이는 우연히도 57세였다. 그는 역대 다른 미국의 전직 대통령들처럼 워싱턴에 남아 권력의 그늘 속에 살기를 거부하고 즉시 짐을 챙겨 조지아주의 플레인즈라는 인구 6백51명의 작은 고향마을로 돌아갔다.
지금 무엇을 하고 있냐구요? 물론 조깅이지요. 낙시질두요. 그리고 자기를 찾아주는 옛 친구들과 어울려 소프트볼도 하지요. 손수 베어내 다듬은 나무로 의자와 책상도 만들구요. 그밖에 또 어떤 일을 하느냐구요? 백악관 시절의 경험을 토대로 책을 쓰면서 틈틈이 대학 강단에서 강연도 하지요. 아틀랜타시에 있는 에모리대학에 세워질 「카터기념 도서관」건립에 따른 기금확보를 위한 활동도 하구요. 최근에는 아내 「로절린」여사와 함께 중국에 건너가 만리장성을 관광하고 돌아왔으며, 네팔로 건너가 히말라야산을 마음껏 구경하고 돌아왔답니다.
한 개인이 어떤 활동적인 일에 조금이라도 더 오래 남아있고 싶어하는 것은 생물학적으로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가 건강하고 자신은 물론 사회를 위하여 좀 더 뜻있는 일을 하고자 열망할 때는 더욱 그렇다. 여기에는 그가 국민학교 교사이건 대통령이건 아무런 차이가 없다.
나는 전두환대통령이 앞으로 한 평범한 시민으로서 자신과 사회, 그리고 우리나라를 위하여 그의 흔치 않은 경험을 살려 좀 더 뜻있고 보람있는 일을 해주게 되기를 간절히 희망한다.
그가 지금까지 대통령으로서 행사하여 온 권력이 사라지는 것은 어찌할 수 없는 일이나 그가 지금까지 그렇게 애써 이룩한 민주국가에서의 한 시민으로서의 권리는 어느 누구보다 적지 않을 것이며, 개인적이며 가정적인 행복은 오히려 크게 늘어날 것임은 분명하다.
주말이면 자주 찾는 과천대공원 동물원에서 혹시라도 전직 대통령을 만나는 영광을 갖게되면 나는 서슴없이 달려가 악수를 청할 것이다. 그리고 그와의 악수를 오래도록 기억하고 자랑스러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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