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용의 용」, 그 지혜가 아쉽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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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개헌정국이 끝내 파장이 됐다.
파장 뒤끝에 으례 그렇듯이 책임떠밀기가 한창이다. 여는 야의 탓이라 하고 야는 여때문이라며 서로 삿대질에 열을 올린다.
책임이 여의 주장대로 야의 분열에 있든, 야의 주장대로 여의 예정된 스케즐에 있든 합의개헌에 기대를 걸었던 국민들로서는 이만저만 실망스럽고 울화가 치미는 일이 아닐수 없다.
개헌 논의는 유신이후 계속 우리 사회의 불안요인이 되어온 이른바 정치권력의 정통성 시비를 일소해 이론의 여지가 없는 국민의 정부를 수립해야 한다는 국민적 여망에 기초를 두고 있다.
이러한 국민적 여망은 어떤 고압적 조치나 어느 누구의 결단으로 덮어버릴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개헌의 「개」자만 들먹여도 역적 모의나 하는 것처럼 몰아치고 짓누르려 했던 것이 어디 한두번이었던가.
1970년대 후반 유신헌법 철폐요구때 당국이 긴급조치 위반이라는 너울을 씌워 수많은 개헌요구 인사들을 투옥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헌요구는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가 끝내는 부마사태와 「10·26」으로 이어졌다.
멀리 갈것도 없이 바로 1년전 정부당국이 야당·재야·학생들의 집요한 개헌주장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했었던가를 생각해보면 안다.
그때도 지금처럼 자구나 표현도 다르지않게 의법처단·원천봉쇄·강경대처를 공언했었다.
그런데도 그처럼 높고 두텁던 「호헌」의 벽이 무너지고 합의개헌을 들고 나올 수밖에 없었던 배경은 무엇이었던가.
두말할 것도 없이 그것은 개헌이 막기 어려운 시대적 요구며 국민적 열망임을 간파했기 때문일 것이다.
정부와 여당이 할일은 이러한 시대적 기본욕구를 바르게 인식하고 충족시켜 나가는 것이지 국민들의 여망을 누르고 봉쇄하기 위해 눈을 부라리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런 점에서 개헌논의 유보발표후 사법당국의 위압적 태도는 언짢고 주객이 전도된 인상이다. 무엇보다 국민의 열망은 계속 상승하는데 이를 억누르고 막는 것만 능사로 안다면 정치·사회적 갈등은 음성화해서 겉으로는 일시적으로 사그라진 것처럼 보일지 모르나 오히려 내연돼 폭발적인 분출을 준비할 개연성이 높아진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최근 우리 사회 곳곳에서 분출하고있는 갖가지 갈등과 마찰도 모든 것을 힘으로 눌러 해결하려는데서 나타나는 양상이 아닌지 반성해볼 일이다.
국민들의 입장에서 볼때 분명히 부당한 구석이 있어서 그 개선이나 조정을 요구해도 정상적인 통로를 통해서는 잘 먹혀들지가 않는다.
거대한 정부나 공권력 앞에 개인의 요구나 주장은 아무리 소리높여 외쳐대도 언제나 「황야의 외침」에 지나지못하고 무력감만 더해간다.
그렇다고 개인과 정부사이에서 매개역할을 해야할 중간집단이 기능을 하는가하면 그것도 아니다.
국회와 정당이 제기능을 못하고 정상적인 노사관계의 틀도 짜여있지 못하다. 언론도 그렇고 사법도 그 모양이다. 하나같이 형해화돼있다.
이처럼 절실한 요구나 주장이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될 때 이해관계와 뜻을 함께 하는 사람들이 집단을 이루어 목소리를 모을 수밖에 없다. 집단행동·집단저항이 괜히 나타나는게 아니다. 순리적으로 적법절차에 따라서는 해결 안되는 문제가 다중의 위력을 이용한 시위·농성·공공건물점거·교통방해로 나오면 그때서야 관계부처 나리들이 달려오고 대책회의가 열리고 조사반이 파견돼 법석을 떨며 대응책을 찾는다.
택시 운전사들이 길거리로 몰려나와 차량에 불을 켜고 경적을 울리면서 교통을 마비시키는 소동을 벌이자 3년동안 질질 끌어오던 고정월급제가 받아들여졌다.
건대사태로 구속됐다가 석방된 학생들이 총장실을 점거하고 기물을 부수며 철야농성을 며칠째 하고나니 징계문제가 해제되고 취소됐다.
이러다보니 서울 어느 동네에서는 아낙네들이 마을앞 횡단보도에 신호등을 설치해달라는 요구조건을 내걸고 가두데모를 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집단행동은 이제 우리사회에서 사회적 과제 해결의 가장 효과적인 시스팀처럼 여겨지는 양상이 됐다.
이는 한마디로 현재 우리사회의 정치·행정이 국민의 욕구를 정상적제도나 과정을 통해 제대로 수렴, 해결하지 못하고 있음을 알려주는 정보신호임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도 당국은 이를 시정하려는 능동적 노력을 보여주는 대신 으례 일단은 시민들이 법질서를 어긴다고 가차없는 의법처단을 강조한다. 집단행동에 나서는 시민들의 입장에서는 문제를 해결해 주지는 못할망정 해결해달라는 요구조차 못하게 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반발한다. 그래서 거듭된 강경 대응 경고나 위압적 분위기에도 집단행동과 저항은 좀처럼 제동이 걸리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극단적 공격성향과 이를 저지하려는 과잉 방어의 악순환이 계속되고 이는 곧 정국 경화와 만성적인 정치·사회의 불안으로 이어진다.
국민들의 살림살이가 나아지고 정치의식이 제고되면 될수록 먹고사는 원초적 욕구보다 자유·인권·민주와 같은 고차적 욕구의 충족을 겨냥하고 이에따라 민주화의 열망은 그만큼 강렬해질 수밖에 없다. 특히 국민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젊은 세대의 욕구 구조를 바로 볼줄 알아야 한다.
오늘 우리 사회의 젊은이들은 자유·평등의 이념과 민주주의를 국민학교에서부터 한글로 교육받으며 자라온 세대다. 가난과 전쟁에 시달리며 성장해 온 기성세대와는 생각부터가 판이하다.
이들의 욕구를 수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민주적 절차와 정치과정의 회복이 시급하다.
민주적 절차는 반대의견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대화를 통해 쟁점을 부각시키고 정리해가며 타결짓는 것이다.
절차가 번거롭고 지루하다고 해서 「소모적 낭비」로 몰아 힘으로 밀어붙이려 하는 것은 결코 민주적일수가 없다.
대화와 설득에 소모되는, 어찌 보면 불필요한 시간은 그 자체가 커다란 효용을 갖는다. 다양한 의견을 취합하고 비판이나 반대의견과 합의를 이루어가는데 반드시 필요하다. 이른바 「무용의 용」이다. 비능률적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이런 과정을 거쳐 도달한 합의라야 진정한 합의라 할수있다.
힘의 행사를 통해 반대의견을 억누르고 봉쇄해서 표면적으로 합의가 된것처럼 외장해 보았자 그 힘이 느슨해지면 그 이전보다 더 심한 반발과 분열이 빚어진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국민의 답답함을 달래줄 「무용의용」, 그 지혜가 너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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