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CEO 인터뷰] 50mL 한 통에 80만원…3대째 화장품을 사랑한 백작 가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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럭셔리 화장품 ‘시슬리’의 필리프 도르나노 회장

“가족끼리 모이면 늘 화장품 얘기를 해요. 함께 회사 일을 하지 않는 가족들이 심심해할 정도죠. 이때 좋은 아이디어가 많이 나옵니다. 늘 이야깃거리가 끊이지 않는 것도 가족이 함께 회사를 경영하는 장점 중 하나죠.”

40년 전 부모가 창업한 가족기업
장기 비전, 일관된 원칙이 경쟁력
변화 주려고 억지로 바꾸면 안 좋아
직원들 약속 안 하고 언제든 찾아와
판매원들, 한달에 한번 꼴 집 방문
강한 유대감·신뢰 고객에도 이어져

1976년 시슬리를 창업한 위베르 도르나노 백작의 아들이자 현 시슬리 회장인 필리프 도르나노(52)가 지난달 8일 서울을 찾았다. 아버지 도르나노 백작의 자서전 『무한한 아름다움(boundless beauty)』 국문판 출간을 기념해서다.

시슬리의 창업자이자 아버지인 위베르 도르나노의 자서전 『무한한 아름다움』 국문판 출간을 위해 한국을 방문한 필리프 도르나노 회장. [사진 시슬리]

시슬리의 창업자이자 아버지인 위베르 도르나노의 자서전 『무한한 아름다움』 국문판 출간을 위해 한국을 방문한 필리프 도르나노 회장. [사진 시슬리]

도르나노 가문은 프랑스에서 유명한 귀족 가문이다. 3명의 프랑스 장성과 한 명의 장관을 배출했고, 위베르 도르나노 전 회장의 부인 이자벨 도르나노는 폴란드 왕족 출신이다. 경쟁이 치열한 화장품 업계에선 시슬리를 고급 스킨케어 브랜드로 성공시킨 화장품 명가로 더 유명하다. 랑콤부터 올랑, 현재 운영하는 시슬리에 이르기까지 도르나노 가문은 벌써 3대째 화장품 사업을 이어오고 있다.

시슬리 제품의 핵심은 식물 추출성분을 사용하는 ‘피토테라피(phytotherapy·약용식물요법)’다. 피부에 효과적이면서도 자극이 적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전 세계에서 품질이 가장 좋을 때 수확한 각종 식물로부터 추출한 최고의 활성성분을 담기 때문에 가격도 비싸다. 특허 받은 식물 활성성분 복합체가 들어 있는 시슬리의 베스트셀러 수프리미아 보므 크림 50mL 한 통의 가격은 80만원이다.

위베르 도르나노 백작의 자서전 서문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시슬리는 자연을 사랑하고 항상 노력하는 우리 가족의 정신을 담고 있다. 그리고 이 책에는 시슬리가 지향하는 가치와 아이디어, 바람과 스타일을 담았다’. 3대째 이어져 온 ‘시슬리 스타일’이란 뭔지, 필리프 도르나노 회장에게 물었다.

행사장 한쪽에 전시된 도르나노가의 역사를 기록한 사진들. [사진 시슬리]

행사장 한쪽에 전시된 도르나노가의 역사를 기록한 사진들. [사진 시슬리]

대대로 여러 브랜드의 화장품 사업을 해 왔다.
“외교관이었던 할아버지가 당시 ‘향수 왕’이라 불리는 프랑수아 코티를 만나면서 화장품 업계에 뛰어들었다. 3명의 주주와 랑콤을 공동 설립했고, 이후 로레알그룹에 매각했다. 아버지와 큰아버지는 함께 올랑(68년 미국의 모턴- 노위치사에 매각)을 만들었고, 이 경험을 바탕으로 76년 아버지가 독자적으로 설립한 브랜드가 시슬리다.”
치열한 비즈니스에서 가족 경영은 어떤 경쟁력이 있나.
“아버지와 어머니가 공동 창립자였고, 아버지가 지난해 돌아가신 뒤에는 어머니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역할을 맡고 있다. 큰아들인 내가 회장, 여동생은 부회장으로 마케팅을 담당한다. 화장품 업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품질이다. 좋은 화장품은 단기간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한 제품을 10년 동안 연구하는 경우도 있다. 장기적인 비전이 있어야 가능한 일인데 가족 경영을 하면 일관된 원칙을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다. 우리 가족은 80년간 화장품 업계에 있었다. 지금도 매주 수요일이면 나와 어머니·동생은 물론 마케팅·패키징팀 등이 모여 제품 회의를 한다. 재무 현황은 제외한, 오로지 제품에만 집중하는 회의다.”
가족끼리지만 의견 충돌도 있을 텐데.
“충분히 얘기하고 토론한다. 가족이라고 해도 일에 관한 한 각자의 위치와 역할이 있으니까. 아버지와 일할 때 사적으로 동의하지 않는 의견이라도 상사이기 때문에 따랐던 경우도 있다. 회사에선 호칭도 ‘미스터 도르나노’라고 불렀다.”
아버지의 경영방식 중 가장 인상적인 것은.
“아버지의 집무실은 항상 열려 있었다. 따로 약속하지 않아도 직원 모두가 아버지와 어떤 주제로도 얘기할 수 있었다. 직원들이 집을 방문하는 일도 잦았다. 전 세계의 판매직원이 한 달에 한 번꼴로 집을 방문해 함께 식사를 하고 이야기를 나눴다. 회사 대표와 개인적인 관계가 형성되면 직원들에겐 동기 부여가 된다. 원한다면 누구든 회사 대표와 이야기할 수 있고 참여할 수 있다는 게 시슬리 스타일 중 하나다.”
76년 설립 후 비교적 짧은 기간에 큰 성장을 이뤘다.
“비결은 물론 제품의 품질이다. 다양한 가격대의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화장품 브랜드가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다. 살아남으려면 독보적인 퀄리티의 제품은 필수다. 마케팅으로 반짝 성공을 이룰 수는 있지만 장기적인 성공을 위해선 최신 기술과 최적의 포뮬러가 결합된 하이엔드(high end·동일 제품 중 가장 기능이 뛰어난) 제품이어야 한다.”
왼쪽부터 시슬리의 대표 상품인 수프리미아 안티에이징 나이트 에센스와 보므 크림. 매년 크리스마스에 맞춰 독특한 디자인을 선보이는 오 뒤 스와르 향수. 1976년 출시한 시슬리의 첫 번째 향수 오 드 캉파뉴.

왼쪽부터 시슬리의 대표 상품인 수프리미아 안티에이징 나이트 에센스와 보므 크림. 매년 크리스마스에 맞춰 독특한 디자인을 선보이는 오 뒤 스와르 향수. 1976년 출시한 시슬리의 첫 번째 향수 오 드 캉파뉴.

시슬리는 비싼 가격으로도 유명한데 고가 라인일수록 더 잘 팔린다.
“처음부터 고가 정책을 의도한 건 아니다. 식물 추출물은 의외로 비싼 원료다. 또 효과를 내려면 양을 충분히 사용해야 한다. 제조회사가 제대로 된 원료를 쓰고 최적의 양을 사용할 수 있는 ‘자유’를 누리려면 가격이 비싸질 수밖에 없다. 고객 입장에선 품질만 좋다면 가격은 주관적인 요소일 뿐이다.”
오래된 제품이 꾸준히 사랑받고 있다. 에센스 로션은 출시된 지 37년이나 됐다.
“나이는 많지만 여전히 혁신적인 제품이다. 제대로 된 포뮬러의 화장품은 오랫동안 성공이 가능하다. 다만 완벽한 제품이 나오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다. 요즘은 끊임없이 새로운 화장품이 출시되는 시대다. 변화를 위해 억지로 뭔가를 바꾸기도 하는데, 때로는 좋은 제품을 만들기 위해 시간을 들여 천천히 나아갈 필요도 있다. 가족 기업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우리 회사 제품개발팀은 ‘신제품을 빨리 만들어 수익을 내야 한다’는 압박에서 자유롭다. 물론 좋은 제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압박은 세다. 하하.”
빨리 바뀌지 않아 ‘올드하다’는 이미지도 강하다. 제품 패키지에도 큰 변화가 없다. 트렌드를 반영하는 노력은 안 하나.
“트렌드를 좇지 않고, 트렌드를 만드는 쪽이 되자는 게 우리의 철학이다. 처음으로 안티에이징 효과가 있는 선케어 제품을 선보였고, 올인원 안티에이징 크림 트렌드도 주도했다. 반면 한창 과일산 성분의 제품이 유행일 때 우린 그걸 따르지 않았다. 우리 판단에 과일산 성분은 효과는 좋지만 너무 자극적이다. 오랫동안 유지되는 브랜드가 되고 싶다면 유행을 따르기보다 아름다움에 대해 진정성 있게 고민해야 한다.”
최근 몇 년간 한국에선 워터 타입 에센스와 쿠션이 인기다.
“다른 브랜드들이 무엇을 하는지 신경 쓰기 시작하면 독창적인 제품이 나올 수 없다. 시슬리는 다른 브랜드를 벤치마킹하지 않는다. 다만 한국 소비자들은 굉장히 전문성 있고 선진화됐다. 한국 시장에서 성공했다는 건 시슬리가 잘하고 있다는 의미라고 자부심을 갖고 있다.”
한국에 자주 오는 편인데 주로 무엇을 하나.
“1년에 한 번 정도 오는데 이번이 벌써 여덟 번째다. 한국에 올 때마다 시슬리코리아 직원들과 등산을 간다. 북한산은 여러 차례 갔고, 경주 남산에도 올랐다. 등산 후에는 사찰에서 밥을 먹거나 한국식 바비큐를 즐긴다. 개인적으로는 삼청동에 있는 국립현대미술관을 좋아한다. 최대한 한국 문화를 경험해 보려고 노력한다.”
‘시슬리 스타일’이란.
“제품에 대한 열정과 가족 같은 기업 문화다. 우린 다른 제품이나 브랜드를 따라 하지 않는다. 경쟁도 고려하지 않는다. 우리 스스로 인정하는 퀄리티 높은 제품을 개발하고, 이 원칙을 직원들과 공유한다. 이런 강한 유대감과 신뢰는 고객에게도 충분히 전달될 거라고 믿는다.”

전도연, 시슬리코리아의 최장수 모델 된 사연

시슬리는 유명 모델을 내세우지 않는 광고로 유명하다. 브랜드의 상징인 S자와 함께 제품이 전면에 등장하는 비주얼만 고수한다. 하지만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한국에서만은 종종 모델을 기용한 홍보 전략을 구사해 왔다. 짧게는 한 달에서 길게는 1년까지 이민정·손예진 등의 인기 여배우들이 시슬리의 광고 활동에 참여했다.

 특히 ‘칸의 여왕’ 전도연은 가장 오랫동안(2015년 9월부터 지금까지) 시슬리의 얼굴로 활약하고 있다. 시슬리 이전에 화장품 모델로 많이 소비되지 않은 신선한 얼굴이자 장인정신을 내세우는 브랜드 가치를 대변하는 데 적격인 연기파 배우라는 게 이유다. 화장기 없이 수수하면서도 기품이 느껴지는 얼굴도 한몫했다.

 필리프 도르나노 회장은 한국 영화를 즐겨 보고 사무실에 배병우 작가의 소나무 사진을 걸어 둘 만큼 한국 문화와 예술에 애정이 많다. 그만큼 전도연과의 인연은 브랜드와 모델의 단순한 관계가 아니라 문화 가치를 공유하는 좋은 파트너인 셈이다.

 글로벌 마케팅 전략상 제품을 전면에 내세우고 유명 모델을 기용하지 않는데 한국에서만 유일하게 연예인 등의 셀레브리티를 모델로 기용하는 뷰티 브랜드의 사례는 또 있다. 프레쉬와 손태영, 클라란스와 김태리 등이 그 예다. 시슬리의 양숙진 과장은 “한국은 스타 파워가 막강한 시장인 데다 실제로도 해당 브랜드를 사용할 것 같은 이미지의 연예인과 파트너가 되면 친숙한 스토리텔링이 가능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유지연 기자 yoo.jiyoe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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