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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에 폭발한 원전…무능한 정부 우왕좌왕 ‘데자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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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원전 사고를 소재로 만든 재난영화 ‘판도라’. [사진 NEW]

원전 사고를 소재로 만든 재난영화 ‘판도라’. [사진 NEW]

7일 개봉을 앞둔 영화 ‘판도라’의 상자가 열렸다. 4년 전 ‘연가시’로 대한민국을 기생충 공포에 밀어넣었던 박정우 감독은 이번에는 국내 최초로 원전을 소재로 들고 나왔다. 원자력발전소에서 발생한 폭발사고와 이를 수습해 가는 과정을 담은 이야기다. 민감한 소재라 투자 유치가 쉽지 않았고, 개봉까지 난항이 이어졌다. 하지만 13일 만에 크라우드 펀딩 최고액(7억원)을 달성하고, 한국 영화 최초로 넷플릭스 월드와이드 배급 계약을 체결하는 등 안팎의 관심이 끊이지 않은 덕에 무사히 극장에 올라가게 된 것이다.

‘연가시’ 박정우 감독 이번엔 방사능
사고로 시작, 인재 겹치며 커져
정치득실 따지다 골든타임도 놓쳐
김명민, 무능력한 대통령역 맡아

영화는 한반도 동남권에 위치한 가상의 ‘한별’ 원전에서 시작된다. 남편과 큰아들을 모두 방사능 사고로 잃은 엄마(김영애 분)는 오늘도 싫다는 둘째아들 재혁(김남길 분)을 원전으로 떠민다. 재혁은 “지은 지 40년이 넘어 너무 노후하다”며 안전성에 의문을 갖지만 어쩔 수 없다. 마을 내 변변한 일자리라곤 원전밖에 없는, 그곳이 바로 삶의 터전이자 일터이기 때문이다. 어느날 규모 6.1의 강진이 발생하면서, 재앙은 시작된다.

왼쪽부터 사고 뒷수습을 위해 발로 뛰는 원전 직원(김주현), 솔선수범하는 발전소장(정진영)과 달리 정작 컨트롤 타워를 통제해야 할 대통령(김명민)은 무능력한 모습으로 그려져 대비를 이룬다. [사진 NEW]

왼쪽부터 사고 뒷수습을 위해 발로 뛰는 원전 직원(김주현), 솔선수범하는 발전소장(정진영)과 달리 정작 컨트롤 타워를 통제해야 할 대통령(김명민)은 무능력한 모습으로 그려져 대비를 이룬다. [사진 NEW]

영화는 무서우리만큼 현실과 닮았다. 특히 사고로 시작된 일을 인재(人災)로 키우며, 정치 셈법을 따지느라 골든 타임을 넘기는 과정이 그렇다. 매뉴얼에 따르면 주민대피령을 내려야 하지만 총리(이경영 분)를 비롯 원자력 발전소와 이해관계에 얽혀 있는 이들은 이에 쉽게 동의하지 않는다. “1만7000명의 주민도 우리 국민”이라는 대통령(김명민 분)의 말에 “지금 경보를 발령하면 전 국민이 동요한다”며 정보통제에만 주력한다. 사태를 수습해야 할 정부는 우왕좌왕하고 그 와중에도 정치 셈법에 골몰한다.

4년 전 처음 기획된 영화가 제작에 난항을 겪는 동안 현실은 영화와 점점 더 비슷해졌다. 지진 안전지대라고 여겼던 한국에서는 규모 5.8의 강진이 발생했고, 세월호 사고에서 컨트롤 타워의 부재를 경험했으며, 아무것도 스스로 결정하지 못했던 무능력한 대통령의 모습이 스크린이 아닌 현실에서 펼쳐진 것이다.

박정우 감독은 “4년 전 영화를 시작할 때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들이 실제로 벌어지고 있다”며 “다른 영화 같았으면 예지력이 있나보다 하고 ‘자뻑’했을 수도 있지만,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길 바라며 만들었는데 현실화되는 것이 두렵다”고 밝혔다.

김명민은 “제가 실제 대통령이라면 그러진 않았을 텐데 재난 현장에 한 번 가보지도 않고 청와대에서 편안하게 연기하려니 송구스러웠다”고 말했다.

박 감독은 ‘판도라’의 가장 큰 라이벌로 “저희 상대는 다른 영화가 아니라 아줌마 둘”이라고 현실을 꼬집으면서도 “사실 현 시국과 더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 대사들도 있었는데 영화를 보는데 도리어 방해가 될 것 같아 편집한 부분도 있다”고 설명했다. 권력자가 아닌 원전의 위험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음을 분명히 한 것이다.

영화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듯 하다. 때로 신파로 흐르고, 지나치게 훈계조로 빠지기도 하지만 이런 일이 현실이 될 수 있음을 충분히 상기시켜주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너무 있음직해서 좀비 소재의 재난 영화 ‘부산행’보다 훨씬 더 무섭다. 원전 폭발과 그로 인한 피해, 대피 행렬 등을 리얼하게 담아낸 영상이 충격적이다. 사고와 무능한 시스템, 부패한 정치인들과 이를 수습해내는 평범한 사람들의 힘, 그리고 스펙터클. 요즘 흥행하는 현실비판 대작영화의 공식을 따른 영화다.

제작진은 강원도 춘천 지역에 5000평 규모의 실물 크기 원자력 발전소 세트를 짓고 촬영했다. 이후 정교한 CG(컴퓨터 그래픽) 작업을 거쳐 원전 격납고가 폭발하는 장면 등 실감나는 영상을 완성했다.

보안 문제로 국내 원전은 취재가 불가능했기에, 한국 원전과 유사하다고 알려진 필리핀의 바탄 원자력 발전소를 답사해 정보를 얻기도 했다. 자문을 맡은 김익중 동국대학교 의대 교수(전 원자력안전위원회 위원)는 “영화적 설정을 위해 상상력을 발휘한 부분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건은 2011년 3.11 동일본 대지진 당시 후쿠시마 원전 사고에서 그대로 일어났던 일”이라고 전했다.

민경원 기자 storym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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