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대 불 운동권학생 기수들의 변신|부정했던 「보수」에 안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9면

【파리=홍성호 특파원】 『나중에 어떤 사회를 건설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할 필요가 없다. 오직 기존체제의 파괴에만 집중해야한다』는 무정부주의적인 급진사상에 물들어 60년대말의 서구사회를 무질서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68년5월」파리학생시위주동학생들이 20년후 오늘날에 와서는 그들이 부정했던 보수적인 기존의 틀속에 하나둘씩 안주하는 모습으로 다시 나타나고 있다.
체제부정에서 현실주의자로 변신한 인물가운데 첫손가락에 꼽히는 것은 68년5월 학생혁명의 주동자였던 「다니엘·콩방디」(42) .
그는 당시 프랑스정부로부터 추방당해 자신의 모국인 서독에 정착했다.
오늘날의 그는 프랑크푸르트에서 발간되는 정치·문화잡지 플라스터쥐트란트지의 발행인이자 급성장하는 녹색당의 핵심멤버가 됐다. 뿐만아니라 지난해에는 프랑크푸르트시장선거에도 출마, 비록 고배를 마시기는 했지만 그가 20년 전에 매도했던 권력을 향해 줄달음치고있다.
「콩방디」는 자신의 노선이 바뀐 것은 결코 아니라고 내세우지만 68년 당시 『노동자와 학생이 공동의 혁명활동집단을 창시하자』던 주장으로부터 요즘엔 『자율적인 사회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우선 기존의 체제속에 적극걱으로 참여하는 것이 필수적인 과정』이라는 현실참여론으로 변해있다.
프랑스일간지가운데 가장 성장속도가 빠른 파리의 리베라시옹지 발행인 「세르지·줄리」도 「콩방디」 등 68년 당시 「르 그랑트로와」 (3명의 거인)의 추종자. 열렬한 모택동주의자였던 그는 73년4월 창간된 이 신문을 당시 2만부 수준에서 10여년 사이에 15만부로 발행부수를 늘린 유능한 경영인으로 자리를 굳혔다.
자본금 9백60만프랑(약13억5천만원)의 리베라시옹지는 지식인층을 주된 독자로 하는 사회당계열의 고급지로서 프랑스 제3의 유력지로 지칭되고있다.
「콩방디」처럼 외국인유학생으로 파리학원사태에 적극 참여했던 급진좌경사상의 기수들 가운데는 각자 고국으로 돌아가 자본주의 기업가가 된 경우로서 암스테르담에서 출판사업을 하는 「로브·슈톨크」, 필라델피아의 바비큐조미료공장경영자 「보비·실」, 소프트웨어개발회사를 차린 튀니지의 「알랭·마무」 등도 있다. 「알랭·마무」의 경우 78년까지는 급진적인 노조운동가였다. 67년 튀니지에서 프랑스로 이주해온 그는 은행의 컴퓨터컨설턴트로 일하다가 섬유회사의 자동화에 필요한 소프트개발회사를 차렸다. 한때 그 자신 배척하던 미국진출을 위해 요즈음은 오히려 벤처캐피틀을 찾아 나서고 있는 형편이다.
프랑스의 유명정객둘중 「파비우스」 전수상, 「레오타르」 문화상, 「마들렝」 산업상, 그리고 대통령특별고문인 「아탈리」씨 등도 당시 파리고등행정학교에 재학, 학원시위의 열파에 한때 휩쓸렸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들과 달리 급진좌경사상을 고수했던 소수의 인물들 중 프랑스의 청년공산주의자연맹을 창설한 「알랭·크리벵」(46)은 3번이나 투옥되면서 69년과 74년 두차례 대통령선거에 나서기도 했으나 유권자들에의해 외면됐고 이탈리아출신의 「발레리오·모두치」 「아드리아나·파란다」 등은 추방되어 귀국, 「붉은 여단」에 가입해 78년 「알도·모로」 전수상 납치살해사건에 연루된 혐의로 투옥됐다.
그후 옥중 「파란다」의 술회는 좌경사상의 결말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나는 줄곧 어리석은 짓만 저질러 결국은 감옥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됐다. 그것은 돌이킬 수 없는 실수였다. 갇혀있는 신세지만 이제 더이상 체제에 대한 갈등은 느끼지 않는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