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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M] '당신을 기다리는 시간' 여백 채우는 줄리엣 비노슈의 아우라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당신을 기다리는 시간’(원제 L’attesa, 1월 28일 개봉, 피에로 메시나 감독)은 갑작스런 아들의 죽음에 비통해 하던 안나(줄리엣 비노슈)가 파리에서 찾아온 아들의 연인 잔(루 드 라쥬)을 만나며 시작된다. 영화 전반에 깔린 상실감을 다루는 감독의 솜씨가 예사롭지 않고, 이를 과장된 행동 없이도 절절이 표현해낸 줄리엣 비노슈(52)는 놀라울 따름이다. 관록의 여배우가 이제 막 영화계에 발디딘 신예 감독과 만나 어떤 질감의 이야기를 만들어 냈을까. 그가 뿜어내는 아우라를 좇아 이 작품을 살펴봤다. 이 영화로 장편 데뷔를 무사히 치른 이탈리아 감독 피에로 메시나(35)와의 서면 인터뷰도 함께 전한다.

영화 `당신을 기다리는 시간` 스틸컷

영화 `당신을 기다리는 시간` 스틸컷

사실 안나의 행동은 의뭉스럽고 수상쩍다. 아무리 아들 주세페(지오바니 안젤로)를 잃은 아픔이 크다지만, 연인을 찾아온 잔에게 아들의 죽음을 알리지 않는 건 뭔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다. 대신 안나는, 마치 잔을 곁에 두면 아들이 돌아오기라도 할 것처럼 그에게 조금씩 애정을 준다. “대체 주세페는 언제 오는 건가요?”라는 잔의 물음에 정확한 답은 하지 않으면서. 그럼에도 우리는 안나에게 쉽게 손가락질할 수가 없다. 안나가 어떤 순간에도 목놓아 울지 않고, 무너져내리지도 않기 때문이다. 장례식장에서도 그는 꺼이꺼이 소리내 울지 않았다. 카메라가 그의 종아리를 따라 흐르고 있는 소변을 비추면 그 큰 슬픔을 조금 짐작할 뿐이다. 그러니 감히 비난할 수 없다.

시간과 공간의 빈틈 채우는 줄리엣 비노슈

안나가 하는 일이라곤 그저 바라보는 것이다. 아들의 연인을, 아들이 남긴 자취를. 시선은 길고 대사는 적다. 시간의 행간에 안개처럼 깔리는 것은 묵직한 비애감이다. 비노슈는 한 인물이 허구의 세계에 발 담글 때의 변화를 과장된 몸짓 없이도 탁월하게 표현해낸다. 그것은 낯선 소설가를 남편인 양 대하며 점점 그의 아내 역할에 빠져드는 엘르(사랑을 카피하다), 자신이 맡은 배역을 계속 거부하지만 실상 그 배역과 너무도 비슷한 여배우 마리아(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와도 일면 닮아 있다. 어떻게든 현실을 부정하고 자신이 상상하는 것에 기대는 이 불안한 인물들은 모두 비노슈의 것이었다.

“사실 이 영화는 대사보다는, 대사와 대사 사이의 여백이 중요했다. 내가 안나 역에 비노슈를 염두에 뒀던 건 아마도 그래서일 거다. 아들을 잃었지만 눈물은 보이지 않는 연기, 고통에 잠식당해 그것을 느낄 수조차 없는 상태. 예상대로 그는 아주 잘 표현해줬다.” 시나리오를 쓸 때부터 안나 역에 이 여배우를 점찍어둔 피에로 메시나 감독의 설명이다.

안나의 시선이 떨어지는 곳, 공간에도 여백이 그득하다. 카메라는 클로즈업으로 안나의 초췌한 모습을 비추다가도 곧잘 멀찍이 뒤로 빠진다. 그러면 넓디 넓은 저택, 숲, 호숫가에서 안나와 잔은 얼마나 작은 존재로 보이는가. “크고 쓸모없는 공간이 그 안에 있는 인물의 고통을 더 잘 보여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는 감독은 “등장인물보다 배경이 더 커보일 수 있게 연출”했다. 이탈리아 시칠리아 섬의 유려한 풍광은 “시칠리아에서 최초로 이혼한 여자”로 살아온 안나가 얼마나 외로운 존재인지 부각시킬 따름이다. 시간의 행간을 채우던 비애감은 이제 공간을 잠식하기 시작하고, 마침내 결말의 아름다운 한 장면에서 폭발한다.

압도적이지만 억누르지 않는 연기

이 작품에서 비노슈와 호흡을 맞춘 이는 펄떡이는 생명력을 지닌 프랑스의 신인 배우 루 드 라쥬(26). 잔이 지닌 순수하고 관능적인 매력은 안나와 대비되며 긴장감을 자아낸다. 비노슈는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2014, 올리비에 아사야스 감독)에서도 젊은 여배우와의 차진 호흡을 선보인 바 있다. 이 영화에서 유명 여배우 마리아(줄리엣 비노슈)는 20여 년 전 자신을 스타로 만들어준 연극에서 젊고 도발적인 시그리드 역이 아닌, 상처받고 자살하는 헬레나 역을 맡게 된다. 마리아는 이 캐릭터에 대한 불만을 쏟아내며 비서 발렌틴(크리스틴 스튜어트)과 끊임없이 충돌하면서도, 발렌틴을 좋아하고 의지하며 미묘한 감정을 쌓아간다. 할리우드 톱스타 크리스틴 스튜어트에 클로이 모레츠까지 가세한 이 영화에서, 비노슈는 그 자신이 흠잡을 데 없는 연기를 보여주면서도 젊은 여배우들의 존재감을 억누르지 않았다.

비노슈의 필모그래피는 하나의 키워드로 설명할 수 없이 다층적이고 풍부하다. 특히 최근작들은 과거의 영롱한 모습을 넘어선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나쁜 피’(1986, 레오 카락스 감독)의 안나, ‘데미지’(1992, 루이 말 감독)의 안나를 거쳐 ‘당신을 기다리는 시간’의 안나가 되기까지 세계적 스타라는 수식을 넘어 아티스트로서의 도전을 끊임없이 해온 덕이다. 이 영화는 아티스트 줄리엣 비노슈가 내놓은 또 하나의 증명이다.

피에로 메시나 감독

피에로 메시나 감독

"죽음을 다루는 데 ‘죽음’이란 단어는 필요 없다"
피에로 메시나 감독

피에로 메시나 감독은 ‘당신을 기다리는 시간’으로 지난해 베니스국제영화제, 런던국제영화제 등에서 경쟁 부문 후보에 오르며 반짝이는 신예 감독으로 주목받았다. 공연 예술을 공부했고, TV 다큐멘터리 작업에도 참여했으며, CF도 만들어 온 다재다능한 이다.

이 영화는 어디에서 시작된 이야기인가.
 “아들을 잃은 지인의 이야기에서 출발했다. 그 친구는 아들의 장례식 후 죽음에 대해 말하기를 거부했다. 내가 관심을 가진 것은 그 친구가 죽음을 받아들이기 너무 고통스러워 현실을 부정한다는 사실보다는, 그의 주변 사람들이 점차 친구의 그런 모습을 존중하고 맞춰주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 영화는 내게 ‘함께 믿는 것’ ‘함께 공유하는 진실’에 관한 이야기다.”
줄리엣 비노슈와의 작업은 어땠나
“시나리오를 본 그녀가 무척 마음에 들어해 먼저 미팅을 요청해왔다. 처음부터 우리 사이에는 매우 강력한 유대감이 있었던 것 같다. 촬영 중에도 특별한 주문을 하지 않았을 정도다.”
몽환적이고 아름답게 그려지는 부활절 축제도 중요한 배경인데.
 “영화에 대한 아이디어만 있고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았을 때, 우연히 어린 시절 봤던 부활절 축제가 떠올랐다. 사람들이 나무 조각상 앞에서 울부짖던 모습이 생생했는데, 당시 수백 명의 사람들이 그 조각상을 진짜 부활한 사람으로 믿는 것만 같았다. 영화의 주제와 닿아 있기에 중요한 배경으로 썼다.”
이 영화와 주제가 비슷한 단편 ‘랜드’(2011)에서도 그렇고, 이번 작품에서도 그렇고 ‘죽음’이라는 말을 한 번도 쓰지 않은 채 죽음을 다루고 있다.
“개인적으로 정말 신중했던 부분이다. 마지막에 두 사람은 결국 모든 것을 깨닫지만, 결코 ‘죽음’을 입 밖으로 내뱉지 않는다. 눈빛만으로 알게 되는 것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두 여성이 아픔을 공유하는 데 있어 그 단어를 반드시 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차기작은
“아직 구체적인 것은 없다.”

글=임주리 기자 ohmaj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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