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 깜깜한 밤에 1km 앞 물체 식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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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권총을 쏘고 있는 사람을 적외선 카메라로 찍은 모습.

불길이 번지고 있는 건물 안에 빠져나오지 못한 사람이 있다고 치자. 소방관들이 그런 곳에서 어떻게 사람을 가장 빨리 찾아내 구할 수 있을까. 적외선 투시경을 방독면 겉에 안경처럼 쓰고 화재 현장에 들어가는 것이다. 사람의 몸에서 나오는 적외선의 종류와 불길이 내뿜는 적외선 종류는 그 파장이 다르다. 이에 따라 사람의 몸에서 방출하는 적외선을 가장 잘 감지해 영상을 만드는 적외선 투시경을 쓰면 연기나 화염이 가득한 화재 현장에서도 사람만 금방 눈에 띈다.

이산화탄소 농도는 공기의 질을 평가하는 잣대 중 하나다. 올해부터 새로 짓는 아파트에는 온도.습도.이산화탄소 감지기 설치가 의무화됐다. 이산화탄소의 농도 측정에도 적외선 센서가 사용된다. 적외선 투시기에는 많게는 수만 개의 적외선 센서가 한꺼번에 모여 있지만 이산화탄소 농도 측정용은 하나만 사용된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이산화탄소가 4.3㎛ 파장의 적외선을 아주 잘 흡수하는 성질을 이용해 이산화탄소의 농도를 측정한다. 즉, 4.3㎛ 파장의 적외선을 공기 중으로 쏜 뒤 그것을 수신해 적외선 양이 얼마나 증감했는지를 파악해 이산화탄소의 농도를 알아내는 것이다.

캐딜락 자동차의 야간 투시경.앞 유리창에 깜깜한 길 위에 있는 사람이 나타나 있다.

이처럼 생활 속 깊숙이 파고들고 있는 적외선 센서 기술이 급속히 발전하고 있으며, 그 응용 분야도 민.군 구분 없이 전 분야로 확대되고 있다. 적외선의 감지 능력이 크게 향상되고 있고, 센서의 크기도 초소형화되고 있는 추세다. 지난해 말 현재 가장 고성능인 적외선 센서는 물체 표면의 온도차가 섭씨 0.03도만 나도 일반 카메라가 명암을 구분하듯 온도 차이가 나는 곳을 구분하는 정도가 됐다. 이는 불과 5년 전에 비해 5배 이상 감지 능력이 높아진 것이다. 적외선 센서의 개당 크기도 5년 전에 비해 약 4분의 1로 작아졌다. 적외선 센서의 소형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 문성욱 박사팀은 새로운 합금(바나듐텅스텐산화물)을 이용해 독자적으로 세계에서 가장 성능이 좋은 적외선 센서를 지난해 개발하기도 했다. 적외선 센서와 카메라 등의 국산화에 청신호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미국은 한국 등 외국에 판 적외선 카메라에 대해 매년 뜯어봤는지 조사하고 있을 정도로 전략 기술로 분류해 관리하고 있다.

외제 고급 승용차에 부착되고 있는 야간 투시경도 역시 적외선 센서를 이용한다. 야간 운전 때 전조등을 이용해 앞으로 볼 수 있는 거리는 불과 20~30m에 불과하다. 고속으로 달릴 경우 전방에 갑자기 나타나는 사람이나 물체를 피하기 어려운 거리다. 그러나 야간 투시경은 앞유리창에 별도의 작은 창을 만들어 마치 대낮처럼 수백m 앞 물체를 볼 수 있게 한다. 비가 오거나 안개가 끼는 날씨에도 그 성능은 영향을 크게 받지 않는다. 국내 자동차 업체들도 고급 승용차 위주로 적외선 투시기를 장착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적외선 투시경은 우리나라가 개발하고 있는 차세대 소총에도 장착된다. 투시 거리는 1㎞에 이른다.소총의 생산비가 1200여만원으로 예상되는데 그중 500만원 정도를 적외선 투시기가 차지할 정도로 적외선 부품은 고가다. 적외선 투시기는 나무 뒤에 숨어 있는 적군도 구분해 낸다. 나무와 사람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적외선 종류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적외선 투시기로 적이 숨어 있는 숲을 보면 색깔이 다르게 나타난다. 물체별로 적외선을 방출하는 비율이 각각 다르다. 사람은 약 80%, 맥반석은 98%, 나무는 30% 정도다.

◆적외선 센서=적외선은 온도가 있는 모든 물체에서 뿜어져 나온다. 이 적외선을 카메라 필름처럼 감지하는 것이 적외선 센서다. 이 때문에 투명인간이 있다고 해도 적외선 투시기를 피해갈 수는 없다. 적외선 투시기로 영상을 만들려면 최소 30만개의 적외선 센서가 배열되어 있어야 한다. 각각의 센서가 영상의 화소가 되는 것이다. 유리는 적외선이 통과하지 못하기 때문에 적외선 투시기의 렌즈는 검은색의 세라믹(ZnSe)을 사용한다.

박방주 과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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