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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인의 작가전] 붕괴 #1. 균열 (1)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_ 붕괴 1년 전.

“세상에는 미세한 균열들이 있지. 그 균열들을 잘 보는 사람들은 소위 말하는 성공을 하게 되는 것이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평생 단단한 세상 속에 갇혀 사는 거야.”

신원기는 수사관처럼 양쪽 팔을 꽉 붙들고 있는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오른쪽에 있는 파란 체크무늬에 짧은 머리 사내는 미동도 하지 않았고, 왼쪽에 서 있는 안경잡이 역시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난생 처음, 아니 일곱 살 때 처음 중국집에서 음식 값을 안 내고 도망치다가 붙잡힌 이후 처음으로 두려움을 느꼈다. 횡단보도 건너편에는 지구대로 이름이 바뀐 신촌 경찰서가 있었다. 그곳으로 끌려들어가서 신원조회를 당한다면 그동안 수배당한 거며, 기소중지한 자잘한 것들이 낱낱이 까발려질 테고, 그렇게 되면...

마른침을 억지로 삼킨 신원기는 파란불로 바뀐 건너편 신호등을 보고는 아찔한 현기증을 느꼈다. 앞쪽으로 쏠리는 힘을 막기 위해 엉덩이를 뒤로 뺀 신원기는 다급한 목소리로 두 사람에게 애원했다.

“이보게들, 감정이 앞서면 일을 그르쳐. 원래 사업이라는 게 실패하면 쪽박에 사기꾼이고 성공하면 사장님 소리 듣는 거 아닌가? 자네들도 그때 서해에서 캐낸 석유 봤잖아. 시추를 잘못한 것뿐이야. 시간만 좀 더 주면...”

“헛소리 그만 좀 해요. 정유소에서 빼낸 원유 가지고 사기 치는 거 다 알고 있으니까.”

무뚝뚝한 파란 잠바의 목소리에는 한점의 감정도 실려있지 않았다. 차라리 화를 내고 길길이 날뛰었다면 그나마 빠져나갈 구멍을 찾아보겠지만 이런 상태라면 희망이 없어 보였다. 주사를 맞으러 병원에 가는 아이처럼 두 다리로 버텨봤지만 젊은 사람의 힘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신원기는 마지막 수단으로 파란 잠바의 발등을 힘껏 밟았다. 갑작스러운 아픔에 놀란 파란 잠바의 손에 힘이 빠져버리자 신원기는 안경잡이의 손등을 힘껏 깨물었다. 안경잡이 역시 비명을 지르며 떨어져 나갔다. 양팔이 자유로워진 신원기는 두려움과 다급함에 잔뜩 좁아진 시야가 신호등이 도로 빨간 불로 바뀌는 것도 보지 못한 채 횡단보도를 냅다 뛰었다. 땀에 젖은 헉헉거림의 끝에서 들려오는 브레이크 소리에 고개를 돌린 신원기는 눈앞에 다가온 파란색 시내버스를 보고는 숨이 멎었다. 버스에 받힌 신원기는 거의 삼 미터는 날아가서 쓰러졌다. 그리고 억세게 운 없게도 배달시간을 맞추기 위해 달리던 중국집 오토바이에 다시 치이고 말았다. 옆으로 기울어진 신원기는 깨질 것 같은 통증과 역겨움에 비명을 지르고 싶었지만 축 늘어진 혓바닥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부러진 갈비뼈가 폐를 정통으로 찌르는 바람에 핏줄을 타고 온몸으로 분배되어야 할 피들이 입과 코를 통해 길바닥으로 쏟아져 나왔다. 구석으로 기울어진 시선에 중국집 배달 오토바이가 쓰러져있는 것을 본 신원기는 넘어진 배달통에 선명하게 찍혀있는 중국집 이름을 보고는 피식 웃고 말았다. 일곱 살 때 음식을 먹고 도망치다가 붙잡힌 중국집과 같은 청룡각이었다.

“이름하고는...”

신원기는 머리에서 흘러내린 피가 망막을 완전히 잠겨버릴 때까지 같은 말만 되풀이했다.

_ 붕괴 10개월 전

“자기, 안에 있는 거 다 알아. 또 불 꺼놓고 무슨 짓을 하려고 그러는 거야.”

찰칵거리는 소리와 함께 현관문이 닫히고, 웃음과 기대에 찬 오갑선의 목소리가 붙박이장을 등진 채 서 있는 김길수의 귀에 닿았다. 천천히 몸을 돌린 김길수는 현관문 앞에서 목이 긴 부츠를 벗기 위해 한쪽 발을 들고 있는 오갑선에게 다가갔다. 한쪽 손으로 신발장 모서리를 잡고서 부츠의 지퍼를 내리던 오갑선은 센서로 켜진 현관등 아래로 다가오는 김길수를 보고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어머, 자기 그 코끼리 팬티 입지 말라니까. 지난번에 자꾸 웃겨서 하다가 계속 빠졌잖아.”

오갑선의 쾌활함 앞에서 김길수는 잠시 당황했다. 지난 몇 달 간 수많은 계획과 연습을 했고, 무수히 많은 경우의 수를 따져가면서 오늘을 기다렸지만 정작 목표물의 미소는 염두에 두지 못했었다. 잠시 마음이 흔들렸던 김길수는 머릿속에 숫자를 떠올렸다.

- 빌어먹을, 아버지, 아버지... 그 많은 빚을 남겨놓고 자취를 감추시면 대출 보증을 서 준 아들은 어떻게 하라고요.

굳은 미소와 함께 마지막 미소를 털어버린 김길수는 신발을 벗은 오갑선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냥, 기분이 좀 꿀꿀해서. 좋아하는 된장찌개 끓여놨어.”

“정말! 울 자기가 결혼식을 앞두고 있더니 더 착해졌네. 앞으로 살림 열심히 해야 돼.”

기분이 좋은 듯한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며 김길수는 어금니를 깨물었다.

- 내가 고작 네년 살림이나 해 줄 처지인 것 같아? 아버지가 사고만 치지 않았으면 넌 그냥 잠깐 데리고 자다가 치워버릴 수준도 안되는 년이야.

일부러 차를 타고 녹번까지 가서 CCTV가 없는 허름한 마트에서 사온 부엌칼을 단단히 움켜쥔 김길수는 부엌에 차려진 된장찌개를 보고는 감탄사를 연발하는 그녀의 뒤로 조용히 다가갔다. 오갑선은 차가운 칼날이 갈비뼈 사이를 파고드는 순간까지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옆구리에 파고든 칼날이 그녀의 몸을 경직시켰다. 팔로 그녀의 목을 감싼 김길수는 그녀의 옆구리에 거듭 칼날을 쑤셔 넣었다. 지하철에서 산 칼갈이로 수십 번을 갈아낸 칼은 마치 고기를 썰 듯 그녀의 살을 쪼개고 갈라놓았다. 어마어마하게 쏟아진 피가 며칠 전 새로 깐 원목 무늬 바닥으로 넓게 넓게 퍼져나갔다. 김길수는 버둥거리던 그녀의 몸이 차츰 늘어졌다. 피가 가득 고인 바닥에 그녀를 떨어뜨린 김길수는 미리 밸브를 열어두었던 가스를 켰다.

- 그다음은? 맞아. 119

속으로 다음 계획을 중얼거리며 전화기 쪽으로 움직이던 김길수는 죽은 줄 알았던 오갑선이 자신의 발목을 잡아당기자 기겁을 했다. 발을 뽑아내기 위해 버둥거리다가 피에 미끄러진 김길수는 그녀의 옆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핏물에 잠겨있던 그녀의 눈은 김길수에게 말하고 있었다.

- 사랑한다며?

간신히 그녀의 손길을 떨쳐버린 김길수는 그때까지 쥐고 있던 칼로 그녀의 목을 꾹 눌렀다. 서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벌어진 목으로 또 다른 피가 터져 나오자, 고통과 경악으로 부풀어 올라있던 그녀의 눈빛도 바람 빠진 풍선처럼 꺼져버렸다. 콜록거리며 몸을 일으킨 김길수는 안방에 있는 전화기를 집어 들고 119를 눌렀다. 신호가 끝나고 남자 목소리가 들리자 김길수는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집에 남자가, 갑선이를 찔렀어요. 빨리 와주세요.”

주소를 묻는 목소리가 묻어 나오는 전화기를 내려놓은 김길수는 붙박이장의 문틈 사이에 피 묻은 칼을 조심스럽게 끼워 넣고는 몸을 던졌다. 으드득거리며 뼈가 긁히는 소리와 함께 몸속으로 불길이 파고드는 것 같았다. 아픔을 털고 칼날에서 몸을 빼낸 김길수는 생각보다 상처가 깊어 보이지 않자 다시 한 번 몸을 날렸다. 좀 더 거센 아픔에 온몸이 오그라드는 것 만 같았다.

-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떨리는 손으로 붙박이장 사이에 끼워져 있던 피 묻은 칼을 뽑아낸 김길수는 식탁 아래 준비해두었던 분리용 쓰레기봉투의 쓰레기들 사이에 칼을 쑤셔 넣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통증이 묻어 나왔지만 아직 할 일이 많았다. 쓰레기봉투 주둥이를 묶고 피를 대충 닦아낸 김길수는 안방 창문 아래로 쓰레기봉투를 떨어뜨렸다. 내일은 아파트 단지의 일반 쓰레기를 수거하는 날이었고, 창문 아래에는 청소 용역회사에서 미리 가져다 놓은 쓰레기 컨테이너가 세워져있었다. 아파트 단지 입구에 있는 쓰레기 분리수거장까지 가기 귀찮은 주민들이 그냥 컨테이너 안에 쓰레기를 던져놓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었다.

강도의 소행처럼 안방의 화장대와 서랍장을 꺼내 내동댕이친 김길수는 멀리서 들리는 경찰 사이렌 소리를 듣고는 식탁 옆 피 웅덩이 속에 누워있는 그녀 곁으로 돌아갔다. 한쪽 손을 배 위에 올린 그녀는 초점 없는 썩어가는 눈으로 천정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과도와 함께 구입한 지포라이터 뚜껑을 연 김길수는 마지막으로 주저했다. 다른 건 다 예측과 계산이 가능했지만 가스가 얼마나 큰 폭발력을 가질지는 몰랐다. 제대로 불이 붙지 않으면 현장의 허점이 고스란히 남을 테고, 심하게 터진다면 자신도 함께 죽거나 심한 화상을 입고 평생 고통을 받아야 할지 몰랐다. 마지막 주저함은 사이렌 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지면서 끝이 났다. 지퍼 라이터의 불을 당긴 김길수는 가스레인지 위로 라이터를 던졌다. 푸른 불꽃이 확 퍼지면서 싱크대 위로 번져가는 걸 본 김길수는 그녀 옆에 누워서 손을 꼭 붙잡았다. 부엌 커튼을 타고 천정으로 올라간 불길이 핑크색 벽지를 잡아먹으며 퍼져나갔다. 아름다운 푸른 불길을 넋 놓고 바라보던 김길수는 현관문을 다급하게 두들기는 소리를 마지막으로 눈을 감았다.

그 다음의 기억은 혼돈과 아수라장이었다. 경찰이 문을 부수고 들어온 것과 폭발이 일어난 것은 거의 동시였다. 김길수는 구급대의 들 것에 실려 나가면서 유리창을 부수고 어두운 세상을 혀끝으로 맛보는 푸른 불꽃을 바라보았다. 기운 내라는 여성 구급대원의 말을 들으며 김길수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위험한 만큼 짜릿한 결과였다. 저 아름다운 불길은 범죄의 흔적과 엉망이 된 과거를 함께 태워버린 셈이었다.

- 새로 시작 하는 거야.

같은 앰뷸런스를 타고 세화 병원으로 이송된 두 사람은 그곳에서 헤어졌다. 김길수는 응급실을 거쳐 중환자실로 올라갔고, 그녀는 본관 뒤편의 영안실로 향했다. 두 사람의 운명을 갈라놓은 균열은 결혼식을 하루 앞둔 밤에 일어났다.

_ 붕괴 4개월 전.

“인생은 아름다워. 워워워어. 슬픔은 버려버려. 헤이 굿바이!”

이성찬은 좋아하는 리쌍의 노래를 부르며 비에 젖은 개천가 조깅트랙을 달렸다. 얼마나 달렸는지는 모르지만 개천가를 따라 난 트랙은 끝이 없었다. 어제 저녁에 내린 비 때문인지 조깅용 트랙은 흠뻑 젖어있었다. 트랙 한가운데 끝없이 이어지는 하얀 줄을 내려다보며 묵묵히 달리던 성찬은 그날의 링 위로 돌아가 있었다.

“잽, 잽을 계속 날리면서 치고 빠지다가 스트레이트로 가드를 벌려. 그다음에 어퍼컷으로 턱을 박살 내면 게임 끝이야.”

어느새 음악은 사라지고 관중들이 내는 와글거리는 소음과 미지근한 땀내가 나는 열기가 성찬을 감쌌다. 트레이너를 자청했던 아버지의 말대로 성찬은 가볍게 잽을 날리며 경기를 풀어나갔다. MBC 신인왕 출신의 아버지는 집안의 반대로 결국 권투 글러브를 벗어야만 했지만 권투를 향한 열정만큼은 벗지 않으셨다. 그래서 아들이 권투를 하겠다고 했을 때 온 집안의 반대를 막아주었다. 성찬은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안양천을 따라 아버지와 함께 달리는 아침 조깅이 너무 행복했다. 깨끗한 공기를 온몸에 적시면 살갗을 통해 들어온 차가운 기운이 온몸을 부풀어 오르게 만들었다. 모든 것이 너무 좋았다. 링 위에 올라가면 아무도 두렵지 않았다. 약간 막히는 상대라고 해도 날카로운 눈을 가진 아버지가 상대의 약점을 꼭 집어주었고, 아버지의 눈은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었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MBC 신인왕 8강전에서 맞붙은 상대는 심민수라는 이름의 복서였다. 주로 스파링파트너만 하던 친구였는데 그 체육관의 출전 선수 한명이 개인 사정으로 불참하는 바람에 링 위에 올랐다는 소리를 듣고는 다음 상대를 머릿속에 생각했었다. 1라운드, 경쾌한 스텝을 밟으면서 상대에게 다가가서 가볍게 잽을 날리던 성찬은 속으로 당황했다. 상대는 야무진 눈빛으로 잽을 받아넘기며 기습적으로 안으로 파고들었다. 키에 비해 긴 리치를 가지고 있던 성찬의 장점을 단숨에 집어삼킨 심민수는 클린치 상황까지 폭풍우 같은 좌우 연타와 어퍼컷으로 성찬을 비틀거리게 만들었다. 클린치가 풀리고 다시 맞붙었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잽을 무시하고 파고드는 심민수이 저돌적인 스텝에 밀린 성찬은 다시 코너에 몰려서 연타를 허용하고 말았다. 빠져나가면서 옆구리에 날아든 펀치에 호흡이 흩어졌다. 어떻게 1라운드를 끝냈는지 모르고 코너로 돌아온 성찬에게 아버지가 귓속말로 외쳤다. 어퍼컷, 어퍼컷!

진한 화장을 한 라운드 걸이 내려가고 2라운드가 시작되자 성찬은 어깨를 좌우로 흔들면서 앞으로 나갔다. 한층 뜨거워진 숨을 토해내며 상대에게 다가간 성찬은 스트레이트를 옆으로 흘리면서 안으로 파고들어갔다. 권투는 상대방과의 공간 뺏기 싸움이었다. 충분한 공간을 확보한 펀치는 한방에 상대방을 무력화시킬 수 있었다. 적절한 클린치와 버팅으로 상대의 공간을 뺏은 성찬은 벌려진 가드 틈으로 펀치를 쏟아 넣었다. 단련된 팔뚝과 달리 연약한 얼굴은 한 대만 맞아도 부어 오르거나 충격이 퍼졌다. 밀리는 상대를 쫓아가며 펀치를 퍼부어대던 성찬은 상대방의 눈에 독기 대신 물기가 어려 있는 걸 보았다. 고통 때문일까? 로프까지 밀려난 상대를 쫓아 악착같이 훅을 꽂아 넣은 성찬은 1라운드에서 당했던 곳을 고스란히 돌려주었다.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은 상대방은 공이 울릴 때까지 끝까지 버텼다. 2라운드 공이 울리고 코너로 돌아온 그에게 아버지가 말했다.

“다음 라운드에 쇼부를 봐. 두들기다가 체력 다운되면 되려 밀린다.”

“걱정 붙들어 매 놓고, 이따 끝나고 돼지갈비나 사 줘요.”

3라운드가 시작되자 성찬은 상대를 쏘아보며 링 가운데로 나갔다. 흐느적거리며 다가오는 상대방에게 툭툭 잽을 던지며 좌우로 돌던 성찬은 상대의 가드가 열려진 틈으로 스트레이트를 던져 넣었다. 적지 않은 타격을 받았는지 지난 라운드에서 그렇게 굳건했던 가드가 활짝 열렸다. 긴 스텝을 밟으며 공간을 만든 성찬은 짧은 어퍼컷을 상대의 턱 한복판에 명중시켰다. 펀치에 맞은 턱이 탁 소리를 내며 튕겨 올랐다. 이 정도면 분명 다운이나 최소한 그로기까지는 갔어야 했는데 상대방은 비틀거릴 뿐 넘어지지 않았다. 두 번 세 번 연달아 어퍼컷을 턱에 박아 넣었지만 상대방의 꺾어진 턱은 도로 아래로 내려왔다. 비로소 성찬은 눈물이 가득 고인 상대방의 눈을 보면서 두려움을 느꼈다. 진한 땀에 젖은 얼굴은 한껏 일그러져있으면서도 무언가를 갈구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갈등과 고뇌가 피어오르기 전 오랜 훈련으로 심어진 무의식이 어퍼컷을 끌어냈다.

마지막 어퍼컷은 턱보다는 목에 가깝게 명중했다. 링에 튕긴 상대가 앞으로 넘어지는 걸 안은 성찬은 상대의 입에서 피에 젖은 마우스피스가 힘없이 바닥에 떨어지는 걸 보았다. 잔뜩 긴장해있던 온몸의 근육들이 일시에 풀어지면서 콕콕 쑤시는 것 같은 통증이 찾아왔다. 레프리가 성찬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상대방을 바닥에 눕히자 성찬은 자기 코너로 돌아오며 두 손을 머리 위로 뻗어 올렸다. 눈곱만큼의 승리감도 느끼지 못한 성찬이 의자에 앉으며 아버지에게 농담을 던졌다.

“아무래도 TKO겠죠.”

하지만 아버지의 굳은 시선은 링 건너편으로 향해있었다. 여전히 의식을 차리지 못한 듯 바닥에 누워있는 상대 선수 주변으로 레프리와 링닥터, 그리고 상대 선수 스텝들이 몰려있었다. 그들의 빠른 말소리는 경기 결과를 알리는 링 아나운서의 목소리에 가려버렸지만 중간중간 내뱉는 혼수상태나 구급차 같은 말들은 알아들을 수 있었다. 놀란 성찬이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아버지!”

“뭐해. 여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어서 대기실로 돌아가. 대오야. 얘 좀 데려가. 빨리!”

성찬은 대오에게 등을 떠밀리면서도 계속 링 쪽을 쳐다보았다.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영문을 몰라 하던 관중들도 하나둘씩 링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대기실로 돌아온 성찬은 뒤늦게 돌아온 아버지의 어두운 얼굴을 보고는 묻고 싶은 말들을 하나도 입에 담지 못했다. 그날 저녁 아버지와 돼지갈비를 먹던 성찬은 심민수라는 이름의 상대 선수가 의식 불명 상태에 빠졌다는 세화 병원 관계자의 말을 빌린 텔레비전 뉴스를 멍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그 모든 것들의 시작이었다. 뇌사상태에 빠진 심민수는 얼마 후 사람들의 시선에서 종적을 감췄지만 성찬에게는 아니었다. 아무리 술을 마시거나, 쓰러질 정도로 운동을 해도 마지막 펀치가 꽂히던 그 순간은 불쑥 불쑥 그에게 나타났다. 특히 최근 들어서 늘기 시작한 악몽 때문에 마음이 불편해진 성찬은 정신을 차리자는 뜻에서 새벽 조깅을 나왔다. 아버지와 함께 나오고 싶었지만 뒷수습 때문에 부쩍 흰머리가 늘어난 아버지는 깊게 잠들어있었다. 한참 달리던 성찬은 이때쯤이면 나타났어야 할 농구 코트가 보이지 않자 당황하기 시작했다. 뜀박질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지만 역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몇 년 동안 새벽마다 뛰던 곳이라 어디쯤에 뭐가 있는지는 잘 알고 있었지만 오늘은 눈에 익숙해있던 것들이 모두 사라져있었다.

“대체, 이게...”

어리둥절해하며 조깅 트랙 위에 멈춰 선 성찬의 발밑으로 갑자기 늘어난 안양천의 물안개가 슬금슬금 침범했다. 안개같이 자욱해졌던 물안개는 갑자기 사라져버렸지만 십 미터쯤 떨어진 앞에는 안개가 남겨놓은 것이 서 있었다. 새벽 세상은 푸르스름했지만 안개가 남겨놓은 것은 어둠뿐이었다. 의아함을 느끼며 새벽 속의 어둠을 응시하던 성찬은 조금씩 다가오는 어둠을 보고는 하얗게 질려버렸다.

“너, 너는...”

어둠은 심민수였다. 물기에 젖은 눈은 여전히 무언가를 갈망하고 있었다. 붉은색 권투 글러브를 낀 손을 눈가 아래로 치켜든 심민수는 어깨를 가볍게 흔들며 접근해왔다. 도망치려던 성찬은 라운드를 알리는 공이 울리는 소리에 붙잡혀버렸다.


작가 소개    
1973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대기업 샐러리맨을 시작으로 커피를 만드는 바리스타를 거쳐 길을 쓰고 있다. 소설과 교양서를 비롯해서 다양한 장르의 글을 쓴다.
장편소설 『폐쇄구역 서울』 『마의1, 2』 『쓰시마에서 온 소녀』 『김옥균을 죽여라』 『바실라』 『명탐정의 탄생』 등을 썼으며, 『한국 추리 스릴러 단편선』 시리즈에 〈불의 살인〉을 비롯한 단편추리소설들을 발표했다.
역사 교양서 『연인, the lovers』 『혁명의 여신들』 『조선의 명탐정들』 『조선전쟁 생중계』 『고려전쟁 생중계』 『조선직업실록』 『조선백성실록』 등을 펴냈다.
2013년 제1회 직지소설문학상 최우수상을 수상했으며 2016년 제21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NEW 크리에이터 상을 받았다.
현재 한국미스터리작가모임에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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