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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시대 급박한 경제…정부 대책은 ‘시장감시 강화’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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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최순실 국정 농단 작동 멈춘 정부

“당장 내년 경제정책 방향은 누구와 협의하고 누구에게 보고해야 할지 암담합니다.”

AI 발생 14일 지나서야 첫 자문회의
각 부처, 최순실 해명자료 내는 게 일
세제개편, 전기요금 누진제 개편 등
대통령 한마디에 뒤집히기 일쑤

경제정책을 총괄하는 기획재정부는 요즘 아노미(규범이 없는 혼돈) 상태다. 청와대가 사실상 마비된 데다 부처 수장인 경제부총리 역시 누가 될지 안갯속이다. 임종룡 금융위원장이 차기 부총리 후보자로 지명된 직후엔 간부들이 주말을 이용해 현안 보고를 했다. 하지만 청문회 등 일정이 진행되지 않으면서 이마저도 손을 놨다. 다른 경제 부처도 국정 농단 의혹과 관련한 ‘해명 자료’를 내는 게 주 업무가 됐다. 도널드 트럼프의 미국 대통령 당선과 미 연방준비제도(Fed)의 금리 인상 시사 이후에도 ‘시장 모니터링 강화’ 외에 뚜렷한 대응책은 나온 게 없다.

사망 사례까지 보고된 ‘H5N6’ 유형 조류 인플루엔자(AI) 바이러스가 국내에서 처음 검출됐지만 농림축산식품부는 늑장 대응을 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김현권 더불어민주당 의원에 따르면 농식품부는 11일 AI 관련 가축방역심의회 자문회의를 열었다. 철새 분변에서 AI 바이러스가 처음 검출된 지난달 28일 이후 14일이나 지난 시점이다. 김 의원은 “최순실 사태로 정부 기강이 해이해지면서 고병원성 AI 차단에서 가장 중요한 신속한 대응이 이뤄지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공직사회가 제 기능을 못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장관의 부처 장악력이 크게 떨어졌기 때문이다. 인사부터 정책까지 ‘디테일’하게 사실상 청와대가 결정하는 구조가 지속하면서다. 경제 정책의 ‘컨트롤타워’ 역시 외형적으론 경제부총리가 맡았지만 실제론 차관급인 청와대 경제수석의 영향력이 더 큰 경우가 많았다는 게 정부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청와대의 영향력을 키운 지렛대는 ‘인사’다. 청와대 근무 경험이 있는 한 공직자는 “과거 정부에선 청와대에선 고위직 인사만 담당하고 나머지 공직자는 최소한의 검증만 했지만 이명박 정부, 박근혜 정부를 이어오며 청와대 비서실의 인사 영향력이 점점 커졌다”고 전했다. 특히 2010년부턴 사정을 총괄하는 민정수석실에 기존 검찰·경찰·국세청·국가정보원을 더해 ‘경제검찰’ 격인 공정거래위원회 직원까지 파견되기 시작했다. 현 정부 들어선 금융감독원 파견자도 늘었다.

핵심 부처 정책도 청와대에서 뒤집히기 일쑤였다. ‘경제혁신 3개년 계획’이 대표적이다. 2014년 기재부는 15개 과제 중심의 계획을 만들어 언론에 사전 설명까지 했다. 하지만 청와대에서 원안을 대폭 수정하면서 부총리의 공식 브리핑이 취소되기도 했다. 또 2013년 세제 개편, 올해 8월 전기요금 누진제 개편 등 청와대 한마디에 정책이 뒤집히는 경우가 잦아지면서 민감한 이슈는 장관의 ‘영(令)’이나 실무자의 ‘판단’보다는 청와대의 ‘지휘’를 기다리는 게 관례화했다.

이창원 한성대 행정학과 교수는 “제왕적 대통령제에서 대통령 비서실이 비대해지면 장관과 부처는 위축될 수밖에 없다”며 “대통령 비서실은 부처 업무 지휘보다 국정 전반의 전략기획 업무 위주로 재편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정치 현실과 현행 헌법의 한계를 지적하는 목소리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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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윤 한양대 행정학과 교수는 “대통령이 국정 철학을 펼치려 해도 국회 입법 지연과 행정 부처의 복지부동에 가로막히는 경우가 많다”며 “그러다 보니 비서실과 사정 기능을 통해 공직사회를 장악하고 국정 동력을 높이려는 욕구가 생기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윤증현 전 기재부 장관은 “현행 헌법은 대통령제와 내각제가 섞여 있는데 양 제도의 나쁜 점만 표출되고 있다”며 “이번을 계기로 헌법 개정 등 국가 거버넌스 개조를 위한 논의가 진지하게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세종=조현숙·이승호 기자 newea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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