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그랜드 캐년」…시시각각 색깔 변하는 협곡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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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싸늘한 카이엔타의 맑은 공기가 폐부까지 스며 들었다. 아침 햇살을 받으며 그곳을 떠나 달리는 기분이 상쾌했지만 길 복판에는 더러 차에 치인 야생동물의 시체가 비참한 모습으로 깔려 있었다. 왜 양떼들은 넓은 초원을 두고 길가에 몰려다니는지? 차가 속력을 내고 달릴 때마다 길가에 몰려있는 양떼를 지키고있는 양지기개가 앞장서서 걱정스러운 눈초리로 지켜보고 있는 모습이 나에게 감동의 눈물을 괴게 했다.

<초원서 만난 양떼>
간혹 작은 휴게소가 스쳐갔다. 휴게소를 스칠 때마다 아들은 차를 멈추고 들어가서 『혹시 고유의 인디언 의상을 걸치고 그림모델이 되어 줄 수 있는 인디언처녀는 없소? 페이는 넉넉히 주겠소』사정하듯 물었지만 모두 별꼴 다 보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옆으로 저었다. 하긴 청바지에 점퍼차림으로 클라와 피자를 팔 정도의 가게를 가진 개화(?)된 인디언들이니 콧대가 높을 듯도 했다.
얼마쯤 가니까 차는 페인티드디저트(Painted Desert)지대에 들어서기 시작했다. 나무 한 그루 없이 넓고 넓은 사막의 곳곳에 무지개 시루떡처럼 갖가지 빛깔의 단층 줄무늬로 굳은 모래산들이 스쳐갈 때마다 무서웠다.
『어머니 여기서 사진 한장 찍습시다. 당신도 같이…』
나는 사진을 찍을 때마다 어색하고 부끄러워지지만 고무줄로 꽁꽁 묶은 머리카락을 풀어 젖히고 긴 얼굴을 짧게 보이기 위해 쌍긋 웃어 보았다.

<그리운 소나무 숲>
화성에 내린 것 같기도 하고 저승길을 방불케 해주는 페인티드디저트에서 한 시간 반쯤 달리면 카메룬이란 마을을 스치게 된다.
6년 전 차녀와 함께 이곳에서 하룻밤을 묵은 일이 있다. 그때 나는 떨떠름한 기분으로 사위를 보게되어 근심이 가득 차 있었다.
어미 심정도 아랑곳없이 차녀는 가게에 들어가 남자용 가죽샌들과 언제 생겨 태어날지도 모르는 새끼 신발을 사들고 『엄마 이것 봐…』할 때 가슴은 철렁 내려앉았었다. 그런데 나 자신은 차례로 두 남자 때문에 몇 천 번이나 우리어머니 가슴에다 못을 박아 멍들게 했던가!
카메룬을 지나면서부터 풍경은 달라지기 시작한다. 그리운 소나무 숲들이 펼쳐지고 이따금씩 스쳐 지나가는 차안에는 인디언 특유의 검은 모자를 쓴 사내가 핸들을 잡고 있었다. 그 검은 모자에 지나간 기억들이 오버랩해왔다.
그때도 뉴멕시코와 애리조나주경에 있는 가랍 이라는 작은 도시를 찾았었는데 왠지 낯설지 않은 검은 모자를 쓴 인디언사나이들이 우글거렸다.

<미로의 교통순경>
나의 전생이 혹시 이곳과 인연이 있지 않았나, 먼 옛날 나를 낳아주신 또 다른 어머니의 육신과 내 내신이 이곳 가랍의 인디언묘지에 묻혔다가 풍화되고 수세기를 거쳐 한국의 남쪽에서 전생한 것이 아닌지 하는 엉뚱하지만 6년 동안 나의 머릿속에 묻혀있던 상념이 터져 왔다.
그랜드캐년이 가까워질수록 점점 기온이 떨어져 으스스했고 소나무들 사이엔 잔설이 쌓여있었다.
그랜드캐년에 당도할 무렵 너울거리던 해도 지고 캄캄해진 길을 따라 빌리지로 내려갔다.
하룻밤 묵을 호텔을 찾는데 무슨 호텔인지 창마다 불이 켜져 있는 큰 호텔이 눈에 띄었지만 꺾어 들어가는 길을 못 찾아 거선을 따라 지나치다보니 이름도 모르는 그 호텔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 미로에서 우물우물 하다가 교통순경에게 걸리고 말았는데 맑은 얼굴에 수염 달린 중년경찰관은 나무라기는커녕 『원가 도와줄 일은 없는가』고 친절히 물어주었다. 창마다 불빛이 환하게 켜진 큰 호텔을 찾는다고 하니까 『호텔 엘 토바…』라고 일러주었다. <제자 천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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