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함께 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504> 폰 브라운, 첸쉐썬·카먼 청 받아들여 미국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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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칼텍 교수시절, 로켓 원리를 강의하는 첸쉐썬.

1 칼텍 교수시절, 로켓 원리를 강의하는 첸쉐썬.

1944년 6월 6일 연합군이 노르망디에 상륙했다. 1주일 후 독일군이 프랑스 북부의 발사장에서 로켓을 영국으로 날렸다. 3일간 쏴댄 4361발 중 2500발이 영국에 떨어졌다. 연합군이 발사장을 점령하자 독일군은 네델란드의 헤이그 인근으로 장소를 옮겼다. 이듬해 3월 헤이그가 점령될 때까지 새로운 로켓 1400발을 영국으로 발사했다. 517발이 런던에 명중했다.
1944년 12월 1일 펜타곤(Pentagon·미국 국방부)은 육군항공사령부 과학고문단을 발족시켰다. 단장에 카먼(Theodore von Karman)을 임명했다. 카먼은 첸쉐썬(錢學森·전학삼)을 워싱턴으로 불렀다. 훗날 당시를 회고했다. “내 친구 첸쉐썬은 칼텍 공학원 로켓 소조의 창립멤버로 2차 세계대전 중 미국의 로켓 개발에 중대한 공헌을 했다. 36세가 되도록 미혼이었던 첸쉐썬은 공인된 천재였다. 그의 연구는 미국의 고속 공기동력학(空氣動力學)과 분기추진(噴氣推進) 기술을 촉진시켰다. 나는 그를 고문단 단원으로 추천했다.”

[일류 스파이 독일에 잠입, 과학자 확보 나서]펜타곤에 진입한 첸쉐썬은 미국의 최고 군사기밀에 접근할 기회가 많았다. 첸쉐썬이 펜타곤에서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칼텍의 분기추진 실험실이 로켓 개발에 열중하는 동안 히틀러가 자살하고 독일이 무조건 투항했다. 일본도 백기를 들었다. 전쟁시절 연합국 일원이었던 미국과 소련 사이에 독일 과학자 쟁탈전이 벌어졌다. 두 나라는 종전 전부터 독일의 로켓 제조 기지와 과학자 명단 확보에 열을 올렸다. 일류 스파이들을 독일에 잠입시켰다.

미 중앙정보국(CIA)의 밀보(密報)를 받은 루스벨트가 즉석에서 지시했다. “인재가 제일이다. 두뇌가 영토보다 중요하다. 독일 본토에 진입하면 로켓 전문가부터 확보해라.” CIA는 폰 브라운(Von Braun)을 비롯한 독일 과학자 체포 계획안을 짰다. 펜타곤도 독일 로켓 기지 조사와 전문가 심문을 위한 조직을 만들었다. 명단 첫머리에 카먼의 이름이 있었다. 첸쉐썬이 빠질 리 없었다.

펜타곤은 독일에 파견한 심문조도 고문단이라 명명했다. 고문단은 군인으로 위장했다. 카먼은 육군 소장, 첸쉐썬은 소령 계급장을 달고 독일 땅을 밟았다. 로켓 기지는 소련군 점령지역이었다. 미군은 약정이건 뭐건 개의치 않았다. 로켓 기지에 밀고 들어가 과학자 492명과 가족 644명, 제작이 끝난 로켓 100여 개와 설계도면 등을 차량 300대에 싣고 사라졌다. 소련군은 6시간이 지나서야 도착했다.

첸쉐썬과 카먼은 미군 막사에서 폰 브라운을 심문했다. 브라운은 한 살 위인 첸쉐썬의 심문에 순순히 응하며 자신의 연구 경력을 상세히 진술했다. 한 구절이 인상적이었다. “어릴 때부터 우주여행이 꿈이었다. 스물두 살 때 첫 번째 로켓을 만들었다. 1800m까지 솟아 올랐다. 군의 관심 대상이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실험실과 발사대 등 모든 시설을 만들어줬다. 1939년 스물일곱 번째 생일 날 히틀러가 발사대에 장착된 로켓을 참관했다. 원리를 상세히 설명하던 중 히틀러가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당황했다. 로켓의 군사적 용도를 설명했다. 히틀러는 딴사람으로 변했다. 귀를 쫑긋거리며 두 눈에 빛이 났다.” 브라운은 카먼과 첸쉐썬의 청을 받아들였다. 미국행을 결심했다. 9월 16일 새벽 대형 수송선 한 척이 뉴욕항에 모습을 드러냈다. 선상에는 귀국 병사 수천명과 독일 교향악단으로 위장한 로켓 전문가 120명이 타고 있었다.

2 1945년 4월 미군 장교 신분으로 독일에 도착한 첸쉐썬(오른쪽 넷째)과 고문단 단장 카먼(오른쪽 여섯째).   [사진 김명호 제공]

2 1945년 4월 미군 장교 신분으로 독일에 도착한 첸쉐썬(오른쪽 넷째)과 고문단 단장 카먼(오른쪽 여섯째).   [사진 김명호 제공]

[MIT 개교 이래 최연소 종신교수된 첸쉐썬]첸쉐썬의 독일 체험은 효과가 있었다. 시야가 넓어지고 학문적으로 얻는 바가 많았다. “귀국길에 영국과 프랑스를 둘러봤다. 프랑스는 만신창이였다. 그 와중에서도 공군 건설에 열중이었다. 영국에서는 독일 로켓의 위력을 눈으로 확인했다. 독일의 제조 능력은 미흡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명중하면 파괴력이 상당했지만, 명중률이 높지 않았다. 미국이 따라잡는 건 시간 문제였다.”

카먼은 원만한 성격이 아니었다. 대학 측과 마찰이 많았다. MIT의 초빙을 받아들였다. 첸쉐썬도 칼텍을 떠났다. MIT는 첸쉐썬을 존중했다. 정교수와 종신교수 임명장을 동시에 줬다. 37세, 개교 이래 최연소 종신교수였다. 카먼의 추천서를 소개한다. “첸쉐썬은 동년배 중 가장 뛰어난 과학자 소리를 듣기에 부족함이 없다. 성숙한 인격과 조직능력도 갖췄다. 지식과 도덕에 대한 충성은 전심전력, 과학에 대한 봉헌을 가능하게 했다.”

1947년 여름, 첸쉐썬은 부친의 위장수술 소식을 접하자 일시 귀국했다. 중국은 국?공내전이 한참이었다. 후쫑난(胡宗南·호종남)이 지휘하는 국민당군 23만이 홍색수도 옌안을 점령하고 중공도 전략을 수정, 반격에 나섰다. 상하이도 예전 같지 않았다. 화류계의 홍등만 여전할 뿐, 물가가 전쟁 전에 비해 1만2000배나 폭등했다.

국민정부는 첸쉐썬의 귀국을 반겼다. 여러 대학에서 손을 내밀었다. 첸쉐썬은 모두 거절했다. 귀국목적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계속>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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