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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M] 진지한데 병맛코드도 잘 소화해··· '동주'의 박정민, 이젠 작가까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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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잘될 것이다.” 배우 박정민(29)이 최근 펴낸 산문집 『쓸 만한 인간』(상상출판)에는 이런 주문과 같은 문구로 가득 차 있다. 인터뷰 전문 월간지 ‘톱 클래스(TOP CLASS)’에 2013년부터 연재한 칼럼 ‘언희(言喜)’를 모아 펴낸 책이다. 그 칼럼의 바탕에는 자신을 자조하는 농담이 담뿍 섞여 있다. 인간 박정민에 대해 알려진 사실은, 고려대학교 인문학부에 진학했다가 다시 한국예술종합학교(이하 한예종) 영상원 영화과에 입학하더니 연극원 연기과로 졸업했다는 것 정도다. 이 책에서 그는 끊임없이 자신을 희화화하고 응원하며 다독인다. 20대 유망주 배우가 스스로와 싸우고 화해하는 과정을 담은 글이 웃음과 감동을 번갈아 선사한다. 이 맛깔난 글은 책으로 출간된 지 20일 만에 3쇄를 찍을 만큼 독자에게 사랑받고 있다. 배우이자 ‘작가’인 박정민과 서울 강남구 신사동의 한 카페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칼럼 ‘언희’를 여전히 연재 중이다. 아주 성실한 필자인 것 같다.
“내일도 다음 호 칼럼을 마감해야 한다. 오래 연재한 것은, 딱히 거절하지 못하는 성격 탓이 크다. 칼럼을 쓰는 3년 반 동안 배우로서 여러 변화가 있었고, 그 흔적이 글에도 남아 있어 칼럼에 대한 애정이 깊다. 하나의 예로, ‘동주’(2월 17일 개봉, 이준익 감독) 개봉 무렵 이 영화에 관한 글을 썼는데 호응이 퍽 좋았다. 점차 칼럼을 찾아봐 주는 분들도 생겨, 그 기대를 배반하고 싶지도 않았고. ‘놀면 뭐 하나’라는 마음으로 쓰기 시작한 것이 여기까지 왔다.”

-읽는 도중 다음 문장이 기다려질 만큼 글을 참 재미있게 쓴다.
“읽기 쉬워서 그런 게 아닐까(웃음). 내가 읽고 싶은 글을 쓰려 노력했다. 두 번 읽어야 이해할 수 있는 문장을 별로 안 좋아한다. 단숨에 읽히도록 일상적 문장으로 쓰려 했다. ‘진심을 담자, 재미있게!’라는 마음이랄까. 최근 ‘길을 걸으며 읽을 정도로 책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는 리뷰를 봤는데, 정말 기분 좋더라. 2005년 한예종 영화과 입시를 앞두고 무라카미 하루키·김영하·박민규·정유정 작가의 소설을 주로 읽었다. 그때 글에 관한 취향이 생긴 것 같다.”

-글에는 농담을 많이 녹였는데, 말할 때는 무척 진중한 모습이다. 의외다.
“말보다 글로 나를 표현하는 게 더 편하다. 평소 신중한 성격이라 ‘내 말이 어떻게 전달될까’에 대해 고민이 많다. 글은 쓰고 나서 지울 수도 있고 수정할 수도 있어 좋다. 본래 성격은 진지하더라도, 연기를 하거나 글을 쓸 때는 조금 가볍고 실없이 보였으면 좋겠다. 사실 ‘말로 기쁘게 한다’는 의미의 ‘언희’란 제목도 친구 사이인 배우겸 감독 조현철과 장난으로 ‘MC 어니’라고 이름 지으며 튀어나온 말이다. 말장난의 연속인 거지(웃음).”

-대학 시절에는 영화 연출과 연기를 오갔고, 배우가 된 후에는 연기뿐 아니라 글도 쓴다. 이 책으로 ‘글 잘 쓰는 똑똑한 배우’라는 이미지가 생길 것 같은데.
“그런 시선이 부담스러워 책 어느 곳에도 내 사진을 넣지 않았다. 배우가 아니라 ‘글 쓰는 이’로 나를 알리고 싶진 않아서. 하지만 3쇄부터는 어쩔 수 없이 책 띠지에 사진이 들어간다. 팔아야 하니까(웃음). 출간 전에는 덜컥 겁도 났다. ‘얜 뭐 하는 사람이야?’ ‘까불고 있네’라는 말을 듣게 될까 봐. ‘나’라는 사람이 투명하게 보이는 책이라, 배우로서 좋은 일은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럼에도 그간 ‘언희’를 좋아해 준 분들에게도, 오래 칼럼을 연재해 온 내게도 큰 의미겠다 싶어 용기 냈다.”

-이 책의 많은 글에서 스스로를 ‘못생긴, 3류 단역 배우’라며 놀리고 다독이길 반복한다.
“나는 비관론자여서 ‘내가 누구보다 재능 없는 사람’이라 생각한다. 자만하는 순간 아무것도 안 되는 사람. 배우 기질을 천성적으로 타고난 이들을 보며 열등감에 시달렸고, 이를 원동력 삼아 20대에는 정말 열심히 살았다. 그것만큼은 자부할 수 있다. 짙은 회색인 『쓸 만한 인간』 표지 색깔처럼 어둡고 힘든 과정이 담겨 있다. 다만 그걸 해학적으로 써 놨을 뿐이다. ‘나는 안 될 놈이지만, 할 수 있을 때까지 해 보자’라는 식이랄까.”

-『쓸 만한 인간』을 보니 ‘박정민’이라는 사람 안에 참 다양한 모습이 담겨 있더라. 10대 소년의 철없고 순진한 모습부터 20대 청년의 패기, 30대 청년의 책임감, 40대 중년의 ‘꼰대’ 기질까지.
“내 속에서 현실과 이상이 늘 부딪치고 있으니까. 철은 없는데 책임감은 가져야 할 것 같고, 노력은 하는데 생각만큼 일이 잘 되지는 않고, 인간은 덜 됐는데 무엇이 올바른 것인지는 알고. 말 그대로 자아분열적인 글인 거다. 내 글에 가벼움과 무거움이 어지럽게 공존하는 이유다.”

 그래도 우리 모두 ‘절망’치 말고 고구마를 심은 곳에 민들레가 나도 껄껄 웃으면서 살아가자. 어차피 끝내는 전부 다 잘될 테니 말이다.  『쓸 만한 인간』 중에서

"그래도 우리 모두 ‘절망’치 말고
고구마를 심은 곳에 민들레가 나도
껄껄 웃으면서 살아가자.
어차피 끝내는 전부 다 잘될 테니 말이다."
『쓸 만한 인간』 중에서

-그래도 늘 긍정적이고 발전적인 태도로 글을 마무리하던데.
“땅을 파고, 파고, 파고 또 파다 보면 마지막에 한줄기 지하수가 나오는 것처럼. 나를 끝없이 분해하다 보면 결국 지쳐서 ‘다 잘되겠지’ 하는 거다(웃음). 일종의 자기 최면이다. 사실 ‘이 책을 통해 다른 누군가를 위로하고 응원해야겠다’는 마음은 크지 않았다. 그저 ‘나 같은 사람들이 공감해 주면 좋겠다’ 싶은 정도였다.”

-가장 마음에 남는 글을 꼽는다면.
“‘엄마’라는 글. ‘엄마에겐 일터가 있는데 집에 돌아오면 그 집도 일터였다’는 문장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엄마를 떠올리며 감정적으로 아주 몰입해 쓰다 나온 문장이었다. 엄마와 애착이 깊어서, 시나리오를 쓰든 다른 글을 쓰든 ‘엄마’라는 존재가 아주 깊게 드러난다. 엄마를 향한 마음이 참 복잡하고 모순적이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이었는데, 이제 그 존재가 사라지는 것이 가장 두려운 사람. 미안하고 고맙고 생각하면 마음 아픈데, 정작 얼굴을 마주하면 그 마음을 표현하지 못한다.”


-결국 『쓸 만한 인간』은 20대의 박정민이 남긴 기록이다. 책과 함께 20대를 돌이켜 보면 어떤 생각이 드나.

“너무 욕심부리며 살아온 것 같다. 꿈을 이루기 위해 너무 많이 노력했다. 많이 울고 많이 화내며 살았는데, 그냥 조금 행복하게 살았으면 어땠을까 싶다. 20대 초반에는 ‘영화과 학생’이 아닌 ‘연기하는 사람’으로 불리고 싶었다. 스물네 살에 연기과로 학적을 옮기고 배우의 꿈이 이뤄지자, 점점 욕심이 생기더라. 남들은 다 무엇이 되어 가는데, 나만 아무것도 아닌 존재 같아서. 그동안 남들 눈을 많이 의식하며 살았고.”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는 모습이 글에도 드러나던데.
“처음부터 연기과에 진학하지 못한 이유다. 공부 잘하던 박정민이 갑자기 ‘배우가 되겠다’고 하면 다들 비웃고 말릴 것 같으니까. 주변 사람들이 그 상황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나만의 작전을 세운 거지. 일단 영화과에 입학하고 나서 군 복무 이후 연기과로 전과하는 계획. 그렇다 보니 항상 남들보다 느렸다. 지금은 그것이 나를 다잡는 힘이기도 하다. 마음속에 욕심이 생길 때마다 ‘난 느리게 가야 해, 안 그러면 넘어져’라고 스스로를 다독인다.”

-열등감을 안겨 준 라이벌이 있었나.
“충남 공주 한일고등학교부터 한예종까지 같이 다닌 조현철. 이 친구는 연출 감각도 비범하고, 연기도 잘한다. 그런데 우리는 늘 함께였다. 영화과에도 같이 들어가고, 이제는 현철도 나처럼 배우가 됐다. 얼마나 경쟁심이 심했는지 영화과 입학 시험을 치른 후 합격자 발표 날, 내 합격 여부보다 이 친구 결과를 먼저 확인했다. 현철이 붙고 나만 떨어지면 정말 미칠 것 같았거든. 다행히 둘 다 붙어 동기가 됐다. 대학교 2학년 때 현철이 그해 화제를 모은 단편 ‘척추측만’(2010)을 만들었다. 그 작품을 보니 영화 연출로는 도저히 얘를 이길 수 없겠더라. 이게 연기과로 전과를 결심한 또 다른 이유다. 그래서 전과 시험에 필요한 독백 원고로 연극 ‘아마데우스’의 안토니오 살리에리 부분을 선택했다(웃음).”

-직접 영화 연출에 도전할 생각은 없나.
“아직은 없다. 내가 감독인 걸 감추고 직장인 동호회에 참여하듯 영화를 만들어 보고 싶긴 하다. 연출자의 언어와 배우의 언어가 퍽 달라서, 연출을 해 보는 것만으로도 연기에 큰 도움이 되니까. 요즘 생각하는 건, 한 가지 소재에 관해 전 세계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는 프로젝트다. 똑같은 것을 보고도 수많은 사람들이 각기 다른 해석을 내놓는 건 정말 흥미롭다.”

박정민은 올해 초 개봉한 ‘동주’에서 시인 윤동주의 사촌이자 오랜 친구이며 라이벌인 송몽규를 열연했다. 뜨거운 민족적 긍지로 독립운동에 뛰어든 송몽규는, 박정민이 가장 책임감을 갖고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 연기한 역할이었다. 그가 촬영 전 중국 옌볜의 송몽규 묘지에 다녀온 것은 많이 알려진 일화. ‘동주’는 박정민에게 제52회 백상예술대상 영화 부문 남자 신인연기상뿐 아니라 연기에 임하는 새로운 태도까지 남겼다. 돌이켜 보면 그는 늘 타오를 듯 뜨겁게 연기했으며, 한 장면에서도 서너 가지 감정을 동시에 전달하는 밀도 높은 연기를 선보여 왔다. 그는 연기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순간, 배우로 살아가는 지금이 무척 기쁘고 행복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동주’를 기점으로 달라진 것이 많을 듯한데.
“그럴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웃음). 외부 조건은 여전히 비슷하다. 다만 연기를 잘하려고 ‘그 지랄’을 떨어 본 경험이 큰 깨달음을 줬다. 극 중 송몽규가 일본 순사 앞에서 ‘그렇지 못해 억울하다’고 오열하는 장면을 촬영할 때, 갑자기 그분의 초라한 묘소가 생각났다. ‘그렇게 죽을 사람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면서 온몸에 긴장감과 전율이 감돌았다. 그 후 모든 역할에 더욱 진심을 다해, 열심히 연기하고 있다.”

-그간 복합적인 감정을 섬세하게 표현해 왔다. 일례로 TV 드라마 ‘응답하라1988’(2015~2016, tvN)이 떠오른다. 극 중 성보라(류혜영)의 못된 남자친구 역할로 ‘3분’ 출연할 때도 인물 성격이 선명히 드러나더라.
“그때는 ‘쪽대본’의 대사를 보고 열심히 준비해 갔다. (짧은 시간 내에) 입체적 인물로 보이고 싶어 캐릭터 분석을 거듭했다. 보라에게 상처 주는 말을 쏟아내지만 내심 미안함도 느끼고, 그 미안한 마음은 자존심 때문에 표현하지 않는 식으로. 어떤 역할이든 인간의 복합적 내면을 면밀히 분석해 연기하려 한다.”

-배우 박정민이 30대에 이루고 싶은 목표라면.
“배우로서 직업적 책임감을 갖고 싶다. 20대엔 ‘돈값’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없었던 것 같다. 물론 큰돈을 받지도 않았고(웃음). 그저 촬영 현장에서 연기하는 내 모습이 좋았다. 30대엔 부모님께 효도도 하고, 가정과 일을 모두 책임지고 싶다. 그러려면 지금보다 더 연기에 매진해야겠지.”

-‘결혼은 늦게 하겠다’는 이야기인 것 같은데.
“20대에는 연기 공부도, 연애도, 노는 것도 다 열심히 했다. 연애 때문에 많이 힘들어하는 타입이라, 주변 사람들이 ‘넌 빨리 결혼해 자리 잡는 게 좋겠다’고 충고할 정도였다. 연애할 때마다 늘 결혼할 생각으로 상대에게 모든 정성을 쏟았고, 연인 관계가 끝날 때마다 상처받았다. 그렇게 몇 번의 결혼에 실패한 후(웃음), 이제는 아예 늦게 할까 싶다.”

박정민의 또 다른 도전, 연극 ‘로미오와 줄리엣’


요즘 박정민은 연극 ‘로미오와 줄리엣’(12월 9일~2017년 1월 15일, 국립극장 달오름극장) 연습에 한창이다. 그는 이 작품에서 동갑내기 배우 문근영과 ‘세기의 커플’로 호흡을 맞출 예정이다. 그에 따르면 “윌리엄 셰익스피어(1564~1616)의 희곡을 큰 변형 없이 연극에서 소화할 것”이라고. 박정민은 “컷을 나누는 영화 촬영과 달리, 무대에서는 한순간도 쉬지 않고 연기해야 한다. 새롭게 대본을 해석해 표현할 수 있는 연극에 푹 빠졌다. 색다른 로미오를 선보이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이에 덧붙여 “흔히 영화 ‘로미오와 줄리엣’(1996, 바즈 루어만 감독)의 주연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연기한, 고상하고 낭만적이며 연약한 로미오를 떠올리는 이들이 많다. 이번 연극에서는 철없고 얌전하지 않고 말재간도 좋은, 하지만 다소 허당 같은 소년 로미오를 연기하려 한다”고 전했다.

김나현 기자 respiro@joongang.co.kr
사진=라희찬(STUDIO 706) 장소 협찬=닐리스커피 압구정점

beyond M magazine M의 문화 가로지르기 프로젝트. 웹툰·TV·문학·음악·연극 등 다양한 분야의 인물을 만나고 새 흐름을 탐구합니다. 문화로 통하고 연결되고 풍성해지는 M 너머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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