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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만일…』이라는 말이 없었다면 세상은 한결 재미없었을것 같다. 설령 그것이 현실과 먼 가정일지라도 『만일…』이라는 말 한마디로 우리는 때때로 위로도 받고, 희망도갖게 된다.
영어문법에서는 있을수 있는 「만일」과 있을수 없는 「만일」을 구별해쓴다. 과거형 동사를 쓰면 현재의 사실과 반대되는 가정을 나타낸다.
그점에선 우리 말이 훨씬여유가 있다. 있을수 있는 가정과 있을수 없는 가정을 똑 떨어지게 구분하지 않는다. 듣는 사람쪽에서 지혜롭게 분별해 알아들으면 그만이다.
『만일 3·3대행진을 그처럼 철저하게「원천봉쇄」하지않았으면』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한국식 화법으로 부질없는 가정을 해본다.
길 거리에 정치인, 종교인, 시민들이 밀려 나와 인도 위로 조용히 행진했다고 치자.
그것으로 「박종철군 49재」는 지나가고 매듭 하나는 풀어지고 말았을것 같다.
물론 행렬 속에선 구호도 나오고, 노래도 부르고, 고함도 지를 것이다. 그런들 어떤가. 행렬이 지나가고 말면 그것으로 그만일 수도 있다.
이런 생각을 두고 너무 나이브하다고 핀잔을 줄지도 모른다. 이른바「평화의 행진」이 맹수의 행진으로 돌변하고, 군중심리는 난중을 만들어내고, 세상은 수라장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때 우리의 막강한 수만의 전투경찰들이 나서서 군중을 해산시키고 최루탄을 쏜들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
그때 「평화의 행진」을 공약했던 사람들을 질타하고 비판해도 그 쪽은 더 할말이 없을 것이다. 세상의 건실한 여론이 그런 무책임한 정치인, 종교인들을 매도하면 그 말에는 힘도 있을 것이다.
백보를 물러서서 원천봉쇄가 불가피하다면 시위자들을 그렇게 마구잡이로 붙잡고, 볼썽사나운 모양으로 끌고가야 하는가. 지하상가에까지 최루탄을 던져야 하는가. 그속의 사람들은 우리 경찰이 데모진압 잘한다고 박수를 보낼까.
「네루」는 그의 자서전에서 일찌기 부질없는 가정의 공상을 나무랐다.
『역사에 대해서 「만일…」이라든가, 가능성이라는 것을 고려하는 것은 부질없는 노력이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고 냉철하게 판단하라는 충고다.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조금만 낮았으면 세계의 지도가 바뀌었을 것』이라는 「팡세」의 명상도 실은 현실과는 거리가 멀다.
우리의 이 어지럽고 가슴 답답한 현실은 「만일…」이라는 가정을할 여유도 없다.
악순환의 고리를 선순환의 고리로 바꾸는데는 허황한 가정보다는 정치인의 결단이 더 절실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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