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은 일제 군사점령에 대한 맨주먹 항의-일제 탄압의 전술·전략 연구…임종국<사학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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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다시3·1절을 맞는다. 그날이 오면 당시 만세의 함성과 함께 일제의 무자비했던 총칼 소리를 듣는다. 거족적인 항일독립운동앞에 일제는 어떤 탄압책을 썼는가. 일제시대연구로 계속 주목되는 저서를 펴내고 있는 역사학자 임종국씨가 최근 일제 군경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그로부터 3·1운동당시 일제 군경의 잔인했던 전략·전술의 실상을 들어본다. <편집자주>』
3·1운동은 주한일본군 상주화 조치가 90% 완성되는 시점에서 폭발했다. 이러한 군사적 위치는 종래에는 별로 주목된 적이 없으나 만세운동의 성격 규정상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왜냐하면 3·1운동과 일본군 상주화라는 두 계기의 폭발이 시기적으로 동일했다는 것은 그 들이 태동·발효의 단계에서도 밀접하게 관련되는 것임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3·1운동의 성격 규정에는 그러한 군사적 위치의 의미가 결코 도외시되어서 안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의미는 무엇인가? 조선에서 일제 정규군의 주둔은 1882년 제물포조약에 의한 공사관 경비병 1백50명에서 시작되었다. 이후 그것은 청일전쟁후의 일본군수비대, 노일전쟁 직전의 일본군 주부대를 거쳐 1904년3월U일에 일제주차군을 출현시켰다. 이것은 강요된 공수동맹인 같은 해 2월23일자 한일 의정서에 근거했다고 하나, 사실은 중립침범의 침입군이었다. 노일개전 20일전인 1904년 1월21일 조선정부는 엄정중립을 선언한 후 열국으로부터 이에대한 주패통지를 받은바 있다. 그러나 이를 무시하고 들어온 일제 작전군은 대궐과 성문을 점령한 상태에서 앞의 공수동맹을 체결했다.
따라서 그것은 강요된 의사표시라 법리상 무효이며 그에 의한 일제주차군도 동맹군은 아닌게 된다. 조선은 일제의 교전상대국이 아니었으니까 점령군도 아니요, 보장점령이나 보호점령이 필요한 여건도 없었다. 즉, 일제주차군은 중립을 침범하면서 침입한 이후의 「사실상의 점령상태」를 전후에까지 계속시킨 불법의 형대로 존재했다. 이러한 불법 군사점령상태를 영구적인 형태로 제도화시킨 것이 일제 상주군의 탄생인 것이다.
즉, 3·1운동은 일제의 불법 군사점령체제가 90% 완성되는 시점에서, 그 불법 군사점령상태에 대해 전개된 한민족의 맨주먹 항쟁이었다. 이런 점에서 3·1운동은 독립운동이면서 독립운동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이것을 독립운동으로만 생각한다면 필자는 3·1정신에 대한 과소평가라고 항변하고 싶다. 독립운동이라면 주권투쟁이요, 따라서 총독의 통치권이 투쟁의 대상이다.
그러면 한민족은 형사의 오랏줄, 즉 통치권 앞에서 만세를 불렀는가? 일본군의 총칼에 맞서서 부른 만세는 통치체제보다 불법 군사점령체제에 대한 부정이며, 따라서 독립운동 이상의 의미를 갖는 것이다.
이러한 만세를 일제는 총칼 하나로 압살하려 했다. 만세운동 직전의 주한일본군의 존재형식은 본국 1개사단의 교대파견제였다.
일본 군부는 주차군 상설화, 즉 군사점령체제 강화를 반대하는 내각을 4개나 쓰러뜨린 끝에 1915년12월 조선내 2개사단 상설화안을 통과시켰다. 다음해 4월에는 제19사단 (나남) 이 편성되었고, 동시에 제40여단의 편성이 진행된다. 이 제40여단을 기간으로 해서 용산의 제20사단은 만세 직후인 4월1일에 기본편성을 완료했다.
3·1운동은 민족사적 의미는 크나 독립의 달성에는「실효」가 없었던 것처럼 평가되지만 나는 달리 생각한다. 군사점령에의 맨주먹의 항쟁 이후 일제는 헌병경찰제를 보통경찰제로, 무관 총독제를 문무관병임제로 수정했다.
맨주먹의 만세는 총칼을 이김으로써, 무단통치를 허울뿐일망정 「문화정치」(?)로 전환시키는 「실효」를 쟁취했다.
군사적 통치색의 근원적인일부를 수정시켰기 때문에 만세는 「실효」 면에서도 성공적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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