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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괴로와 자살 기도 ?생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신민당 대전 성지원사건진상조사단은 지난10일부터 5일간의 현지실태조사를 통해 수집한 성지원내의 각종 인권유린사례를 14일 발표했다.
조사단은 그간 성지원측의 완강한 거부로 직접적인 현장조사를 할수는 없었으나 과거에 수용됐다 퇴원한 사람들로부터 증언을 녹음하는등 탐문조사활동을 벌여왔다고 이철의원이 밝혔다.
다음은 조사단이 발표한 인권유린사례중 정구형씨(46·가명·건축기능공· 대전시용전동) 의 경우.
『나는 지난84년4월4일 밤9시쯤 약간의 술을 마시고 대전역 대합실에서 앉아있었는데 갑자기 처음보는 두사람이 「증명서좀 보자」 고 요구한뒤 양팔을 끼고 공안실로 데려갔다.
공안실에는 나 외에도 12∼13명이 앉아 있었으며 우리들은 이들 두 사람에 의해 차에 실려 당시 오정동에 있던 성지원에 닿았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이들은 이유도 묻지않고 우리들을 구타했다.
다음날 아침 기상하자 이들은 기합을 주었는데 쪼그려뛰기, 멍석말이등 견디기힘든 것들이었고 우리들은 온몸이 흙투성이가 되고 옷이 찢어졌다.
그때 성지원에서는 전신 증명사진을 느닷없이 찍어댔다.
우리들이 부랑아임을 증명키위한 것으로 성지원측은 나중에 신문에 난 간첩사진처럼 개인기록카드에 부착해놓고 가족들이 나타나면 이것을 보여줬다.
붙들려온 다음날상오8시쯤. 연기군전의면소정리에 있는양지원으로 「탑차」에 실려가정규신병훈련교육을 받았다.
그곳에는 훈련중대장이 있으며 대개 4주간의 훈련을 받게되지만 반항하는 사람들은 6개월에서 1년간씩 훈련을 받기도 한다.
노동력이 있는 사람들은가족에게 연락조차 안된다.
나는 그곳에서 건축노동자라는 점이 감안돼 인근 대미고개에서 소성국민학교에이르는 4㎞의아스팔트포장작업에 4개월동안 투입됐는데 1백여명의 다른 원생들과 함께 일했다.
매일 새벽부터 깜깜해져 작업이 불가능할 때까지 일을 했다.저녁식사후에는 쥐잡기·몽둥이찜질등을 당했다.
한번은 하청작업인 시내 보도블록공사에 동원됐으며 때때로 모심기·벼베기·전선피복벗기기등의 작업을 했다.
그곳에선 원생들로부터 볼펜이나 연필이 발견되면 반쯤 죽을때까지 구타를 가하므로 편지는 전혀할 수가없었다.
지난 85년 8월에 전원생이 가담한 3∼4일간의 폭동이 있었다.
원장측은 문을 닫고 물과식사공급을 중단했으며 때때로 전기공급도 중단했다.
나는 현재 흥국탄광과장으로 있는 동생이 행방을 수소문한 끝에 지난 85년7월31일 찾아와 석방됐다.
학원장은 원생들에게 가끔 통장을 흔들어 보이면서 「여러분들에게 하루 4천5백원씩의 임금을 주고있다」고 말했지만 실제로 확인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함께있던 정기수씨 (48) 는 그곳 생활이 괴로와 유리창을 깨고 자신의 가슴을 찔러 자살을 기도한끝에 입원하기도 했다.
그곳에선 함께있던 원생이사라지면 「깨졌다」 (죽었다는뜻)거나「정부미부대가 됐다」고 말했다.
양지원생들이 죽었을 경우에는 소성국민교부근 야산에 정부미부대에 싸서 쥐도새도 모르게 밤에 묻어 버린다.
내가 양지원에 있는 동안 최소한 30명은 죽은 것으로 추측된다.
식사는 1식1찬이며 가끔1식2찬인 경우도 있다.
밥은 질이 안좋은 정부미로 지으며 반찬은 시장에서 팔다버린 배추·무우·쓰레기된장국·콩나물국등이다.
간식은 밀가루빵에 우유가 지급된다. 우유는 커다란 군용식기통에 물을 가득 붓고분유 3통쯤을 타서 만든다.
난방시설은 1개 내무반(보통 33∼40명수용) 에 연탄난로를 1대 설치하고 하루에 연탄 2장씩만을 사용해 간신히 불기운이 유지될 정도다.
l인당 군용 담요 한 장씩 지급되며 3명이 석장을 가지고 이불과 요를 겸한다.
원생이 사망할 경우 시청에서 장례비 명목으로 1인당 10만원씩 지급된다고 하는데 이돈의 사용처가 불분명하다.·
나는 출소당시 (85년7월31일) 작업소대장이었는데 1년4개월간의 임금으로 5만원을 받았다. 재소중 작업하다 왼손 가운데손가락이 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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