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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속으로] ‘송곳’ 얘기 듣는 순간 퍼뜩 예수 생각…늘어진 ㅅ은 골고다 오르는 모습이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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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글씨에 숨결 넣는 캘리그래퍼 강병인

‘꽃’이 기지개를 켜듯 흐드러지게 피어난다. ‘콩’은 콩콩콩 튀어 오른다. 영묵(永墨) 강병인(54) 작가의 글씨를 바라보고 있으면 자음이 꼼지락댄다. 모음이 말을 건다. 글씨를 아름답게 쓰는 기술을 뜻하는 영어 ‘캘리그래피(Calligraphy)’, 순우리말로는 ‘멋글씨’라고 한다. 강씨는 이 분야의 대표 작가다. ‘참이슬 Fresh’ ‘산사춘’ ‘화요’ 등을 썼고, TV 드라마 ‘정도전’ ‘미생’ ‘송곳’, 소설 『초한지』 『객주』 등의 제목 글씨가 그의 손에서 탄생했다.

중학교 때 추사에 감탄해 서예가 꿈
군대서도 보초 서고 돌아와 글씨 공부
참이슬·화요·산사춘·미생 등 히트

“솟는다의 ㅗ 길면 솟아오르는 느낌
봄 글자엔 땅(ㅁ)과 가지(ㅗ)와 잎(ㅂ)
한글 안에는 표정과 형상 들어 있어”

최근 캘리그래피에 대한 생각과 그간의 작업을 정리한 책 『글씨 하나 피었네』(글꽃)를 출간한 강 작가를 서울 옥인동 ‘강병인 캘리그래피 연구소 술통’에서 만났다. 작업실 1층에서는 틈틈이 쓴 한글 서예 작품과 디자인 캘리그래피를 모은 작은 전시가 열리고 있었다.

소나무의 강인함이 느껴지는 ‘솔’ 자 앞에 선 강병인 작가. 초성 ‘ㅅ’으로 산과 솔잎을, 중성 ‘ㅗ’로 나무 기둥을 표현했다.

소나무의 강인함이 느껴지는 ‘솔’ 자 앞에 선 강병인 작가. 초성 ‘ㅅ’으로 산과 솔잎을, 중성 ‘ㅗ’로 나무 기둥을 표현했다.

몇 년 새 많은 작업을 했다.
“전업 작가로 활동하기 전 출판사나 기획사에서 디자이너로 일하며 쓴 글씨까지 합치면 훨씬 많을 거다. 한국에서 캘리그래피가 예술, 디자인의 한 장르로 자리 잡은 지가 얼마 안 된다. 1990년대 후반부터 글씨로 먹고살 길을 모색했는데 찾는 곳이 없었다. 2006년 ‘참이슬 Fresh’가 나오고, 2008년 김수현 작가의 드라마 ‘엄마가 뿔났다’가 인기를 끈 게 내게도 전환점이 됐다.”
붓으로 글씨를 쓰는데 서예가로 부르는 게 나을까.
“내 바탕이 서예인 건 사실이다. 붓으로 쓰면 획의 굵기, 먹의 농담 등 표현의 범위가 넓어진다. 요즘 캘리그래피를 배우려는 사람이 많은데, 일단 한글 서예의 기본인 판본체와 궁체를 배우라고 말한다. 한글 붓글씨의 원형을 접하며 한글의 구조와 호흡을 제대로 이해해야 자신의 철학과 해석을 담은 새로운 글씨도 쓸 수 있다.”
강병인 작가가 작업한 주류 브랜드들. [사진 김경록 기자]

강병인 작가가 작업한 주류 브랜드들. [사진 김경록 기자]

강 작가는 경남 합천의 산골 마을에서 자랐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서예를 처음 배웠다. 중학교 때 교과서에서 추사(秋史) 김정희(1786~1856)의 글씨를 보고는 감탄하며 서예가의 꿈을 담은 영묵(영원히 먹과 함께한다는 뜻)이란 호를 지었다. 부모님이 갑자기 돌아가시며 생계가 어려워져 경기도 성남으로 올라와 가구 공장에 다녔다. 고졸 검정고시를 준비하던 공장 기숙사 책상 한쪽에 늘 먹과 종이를 뒀다. 심지어 군대에서도 “새벽에 먹을 갈아놓고 보초를 서고 돌아와 글씨 하나 쓰고” 하루를 시작했다.

정식으로 서예를 배우진 않았는데.
“그냥 좋아서 독학했다. 대학은 제대 후 일하면서 시각디자인 전공으로 뒤늦게 마쳤다. 어디 가든 자리에 먹과 붓을 두고, 비가 오면 ‘비가 온다’고 쓰고 기분이 좋으면 ‘기분 째지네’라고 쓰고. 그렇게 쓰다 보니 한글의 어떤 ‘표정’을 발견하게 됐다. ‘솟는다’의 ‘ㅗ’를 세로로 길게 늘여 쓰면 진짜 솟아오르는 느낌이 나지 않나. 소리 안에 어떤 형상이 들어 있는 거다.”
책에선 ‘의미적 상형성’이라고 했다.
“어려운 얘기가 아니다. 한글은 ‘표음문자’라고 하지만 『훈민정음 해례본』을 보면 한글의 초성- 중성- 종성 형식은 ‘하늘- 사람- 땅’을 상징한다. 글자 안에 자연과 사람이 있다는 거다. 순우리말은 특히 그렇다. ‘봄’이란 글자엔 땅(ㅁ)과 가지(ㅗ)와 잎(ㅂ)이 보이고, ‘칼’은 모양도 날카롭지 않은가. 한글은 매우 디자인적인 글씨다.”
의뢰를 받으면 일필휘지로 쓰나.
“관련 정보를 최대한 흡수하고 생각한 후 어떤 느낌이 내 안에서 나올 때 써 내려간다. ‘미생’의 경우 줄거리를 듣고 ‘내 얘기다’ 싶어 바로 하나 쓰고, 며칠 뒤 몇 개를 더 써 보냈는데 처음 쓴 글씨가 선택됐다. ‘송곳’ 같은 경우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는 예수가 생각났다. 길게 늘어진 받침 ‘ㅅ’은 그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강 작가는 한글을 입체화·공간화하는 작업도 하고 있다. 철 조각가 이근세씨와 협업해 ‘꽃’ ‘춤’ 등을 철제 조형물로 만들었고 옆에서 보면 ‘쉼’이란 글자가 나타나는 의자도 디자인했다. 그는 “뉴욕의 ‘아이러브뉴욕(I LOVE NY)’ 조각처럼 한글의 조형성을 살린 상징물을 만들고 싶다”며 “나의 꿈은 한글의 아름다움을 온 세상에 퍼뜨리는 것”이라고 말했다.

[S BOX] 아름다운재단에 기부한 신혼부부에게 가훈 써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강병인 작가가 지난 5월 결혼한 김현봉(36)·김지원(32)씨 부부에게 써준 가훈(家訓)이다. 부부는 신혼의 초심을 오래 기억하고 싶다며 가톨릭 기도문인 이 문장을 선택했다. 강 작가가 지난해부터 아름다운재단과 함께하고 있는 ‘신혼부부에게 한글 가훈 써주기’다.

결혼을 앞둔 부부가 혼수나 결혼식 비용 등을 아껴 100만원 이상을 재단에 기부하면, 이들이 고른 가훈을 강 작가가 붓글씨로 써 액자로 만들어준다. 강 작가는 이미 아름다운재단에 평생 글씨 기부를 서약했다. “제 힘이 닿는 한, 글씨로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많은 일에 참여하고 싶어요. 집집마다 예쁜 한글 가훈 하나씩 걸어두면 정말 좋겠다고 늘 생각해 왔던 터라, 제가 먼저 제안했죠.”

지금까지 여러 부부에게 ‘행복 건강 그리고 돈’ ‘나무처럼 숲처럼’ 등의 가훈을 선물했다. 어려운 점도 있다. 신혼부부들이 ‘정직’ ‘신뢰’ 이런 한자어를 부탁할 때다. 강 작가는 “ 경쾌한 캘리그래피 작품을 선물하고 싶은데 ‘신뢰’ 같은 단어를 신나게 흘려 쓸 수는 없어 고민”이라며 “ 예쁜 우리말로 가훈을 지어 많이 참여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글=이영희 기자 misquick@joongang.co.kr
사진=김경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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