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100년전 거울로 오늘을 보다] 23. 개화기 불교-일본의 영향 (허동현 교수)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6면

개화기 조선의 불교계를 평가할 때, 당시 승려들이 일본에 호의적이었다는 점을 비판합니다. 조선의 근대화 과정에 일본의 영향력이 중요한가 아니면 주체적 노력이 중요한가라는 논란이 '불교 근대화'과정에도 적용되는 것입니다.

박노자 교수는 당시 일본 불교계의 변화는 조선 불교 근대화의 모델이었다고 하면서, 이를 오늘의 '민족주의 '관념으로 비판하기보다 개화파의 전반적 흐름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에 대해 허동현 교수는 당시 일본 불교가 귀족 불교를 벗어나 대중 속으로 들어 가려했던 점에 주목하면서, 조선 불교를 대중화 하려는 노력이 나라가 망한 후 1910년대 한용운 때 나오기 시작했다는 점을 아쉬워합니다.주체적 노력이 부족했다는 것입니다. [편집자]

개 화승 이동인의 일본 밀항(1879)이나 한용운의 일본 유학(1908)은 일본 불교계의 도움으로 가능했고, 갑신정변(1884)과 갑오경장(1894~95)도 일본 정부의 무력과 경제적 지원에 힘입어 일어난 것이기에 일본에 의존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조선불교유신론(朝蘚拂敎維新論)'(1910)이 웅변하듯 근대 불교 만들기를 꾀한 한용운의 노력과, "일본이 동방의 영국 노릇을 하려 하니 우리는 우리나라를 불란서로 만들어야 한다"는 김옥균의 의지, 그리고 8백만 원의 차관을 기반으로 3년 안에 자립경제를 이룸으로써 일본 의존에서 벗어나려 한 어윤중의 갑오경장 청사진을 보면, 한 세기 전 불교계나 개화파 인사들이 '종속 발전'만을 꿈꾸었다고 할 수는 없지 않을까요?

이들의 행동과 사상에서 외세 의존성뿐 아니라 자주 독립성 또한 보이는 까닭에, 어느 한 쪽만을 강조하는 것은 '가치 중립적'인 분석이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다시말해 일본의 침략성과 개화파.불교계 인사들의 몰주체성만을 규탄하거나, 반대로 주체적 노력을 애써 높이는 것만으로는 한 세기 전 참담한 실패의 역사에서 우리의 책임을 설명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지구촌 시대를 말하는 오늘날에도 우리의 삶이 국가의 틀을 넘어서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라면, 근대 불교계의 '민족의식 결여'에 대해 무턱대고 눈감을 수도 없지 않습니까?

"우리 본원사(本願寺)는 '종교는 정치와 서로 상부상조하며 국운의 진전.발양을 도모해야 한다'는 것을 신조로 삼고 있었다. 메이지 정부가 유신의 대업을 완성한 뒤로부터 점차 중국.조선을 향해 발전을 도모함에 따라 우리 본원사도… 중국.조선에 대한 포교를 계획하였다('朝鮮開校五十年誌', 1922)."

후쿠자와 유키치가 일본의 승려를 "정부의 노예('文明論之槪略', 1875)"라고 표현할 정도로, 한 세기 전 일본의 불교는 제국주의 침략의 도구로 이용된 국수주의적 종교였습니다. 그러니 그들의 침략을 받은 우리 불교가 아직도 '국가주의적.군사주의적 왜곡'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책임을 일본에 돌릴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개화파들이 근대국가를 세우지 못하고 실패한 이유에 대해, 국내에 지지기반이 없는 왕조에 기생하던 관료집단으로서 스스로의 꿈을 실현시킬 만한 경제.군사 기반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평가한다면, 불교계가 주체적인 근대화를 이루지 못한 이유 역시 우리 안에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요?

메이지유신 직후 일본 정부는 신도(神道)를 국교로 정하면서 불교와 엄연히 다르다는 명분(神佛判然)을 내세워 신사에 남아 있는 불교적 요소를 없애려 한 적(廢佛毁釋)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탄압 속에서도 일본 불교계는 '사원불교에서 가두불교'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은둔불교에서 참여불교로, 나아가 귀족불교에서 대중불교로 시대의 변화에 발맞춰 거듭나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개화기, 특히 1880년대 초 '선진문물 수용'에 있어 이동인과 탁정식(卓挺埴) 같은 승려들과 유홍기.김옥균.서광범과 같은 불교도들의 활약이 눈부셨음에도 이들 중 어느 누구 하나 일본 불교를 모델로 한 불교의 대중화나 근대화를 언급한 적이 없다는 것이 못내 아쉽습니다.

이동인은 일본에서 활동하던 중 "항상 국제간의 정세를 이야기하면서도 불교에 관해서는 말을 하려 하지 않았다('朝鮮開敎五十年誌')"고 하며, 김옥균도 일본 망명 중인 1886년에 "외국의 종교(개신교)를 끌어들여 교화에 도움이 되도록 하라"고 국왕에게 상소했을 뿐이라고 하더군요.

불교를 세간으로 끌어내려 대중의 눈높이에 맞추려는 노력이, 나라가 망한 이후에야 한용운 등 극소수의 승려들에 의해 시도되었다는 것이 우리 불교가 근대화에 뒤처진 주된 이유가 아닐는지요.

"불교가 민중과 더불어 동화하는 길이 무엇인가. 첫째 그 교리를 민중화함이며, 그 경전을 민중화함이다. 둘째 그 제도를 민중화함이며, 그 재산을 민중화함이다"('불교유신회', 1922). 불교의 개혁을 바라는 한용운의 이같은 외침이 아직도 우리의 가슴을 때리는 듯합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