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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내부사춘이여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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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중국 고속에 관리들이 청의에 청정(책=머릿수건)을 쓰고 동방에 절하는 의식이 있다. 입춘 행사다. 봄은 동쪽에서 온다고 생각한 것이다.
서양의 시인들은 흙에 입을 맞추며 봄을 맞았다. 「W·블레이그」의 시에 귀를 기울여 보자.
『바람아, 동녘 언덕으로 불어오너라. 향기로운 옷자락에 입맞추며 아침 저녁 자연의 숨소리를 맛보아라. 그대 그리워 사람에 메마른 땅 위에 진주를 뿌려다오.』 우리나라에선 옛날부터 입춘이면 대문마다 축련을 써 붙였다. 「입춘대길」은 흔히 보는 글귀고 「국태민안」이나 「가급인족」과 같은 축장도 있다. 모두 봄을 기꺼이 맞이하는 마음들이다.
요즘은 아파트생활에 그런 춘첩자를 써 붙일 그럴듯한 대문도 없다. 어느 새 백화점들이 절후를 먼저 알고 「입춘대길」을 내붙인 풍경이 도리어 어설퍼 보인다. 도회지 사람들은 계절이 오는지, 가는지 신문 광고나 보아야 알 수 있는 세상이 되어가고 있다.
같은 봄맞이라도 동·서양의 감성이 다른 것은 무슨 까닭인가.
옛 한시들은 하나같이 봄을 슬프게만 그렸다. 두보는「절구」에서 타향의 봄을 노래하며 『어느 때나 고향에 돌아갈꼬(하왈하귀년) …』하고 한숨지었다.
이백의 봄은 더 애잔하다. 『호지엔 화초가 없어 봄이 와도 봄 같지 많네(춘내부사춘)』 그 봄이 얼마나 마음을 아프게 했으면 옷이 커졌을까. 허리를 줄이러 하지 않았는데도 몸이 야윈 것을 걱정한다.
미국 시인 「A·브래드스트리트」의 노래를 들어본다. 『봄은 웃는 얼굴로 연초록색의옷을 입고 오네. 겨우내 흩어졌던 머리를 곱게 빗고 덥지도 춥지도 않은 날, 죽음속에 얼어 붙었던 땅에 생명의 입김을 불어넣네』
오늘의 우리 시인은 어떤 노래를 부를까. 『온 겨우내 검은 침묵으로 추위를 견디었던 나무엔 가지마다 초록의 눈을 그리고 땅속의 벌레들마저 눈뜨게 하옵소서.』 박희진은 차라리 기도를 올린다.
그러나 우리의 봄날은 아직 춥고 으스스하기만 하다. 여한, 춘한… 글자 그대로의 입춘이다.
세상마저 그 모양이어서 입춘대길은 백화점의 경사일 뿐이다. 고문치사사건만 해도 검고 어두운 겨울의 일인데, 그 이름도 무색하게 복지원들의 잔혹한 얘기는 춘한만 더해준다. 시국 또한 강경으로만 치달아 입춘이 와도 봄 아지랑이가 보일 것 같지 많다. 우리는 언제나 연초록 향기로운 옷자락에 입맞추는 봄을 맞을 수 있을까. 춘내부사춘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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