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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 힘」이 만든 민주헌법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필리핀의 신헌법 국민투표는 이 나라 민주화를 정상적인 궤도에 올려놓은 획기적인 일이다.
아직 개표가 끝나진 않았지만 투표율 90%, 찬성률 78.5%라는 중간개표는 새 헌법안이 통과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국민투표 과정에서 다소의 불상사가 없었던 것은 아니나 대체로 평온하게 끝난 것은 필리핀의 민주발전을 위해서 더없이 다행한 일이다.
투표과정을 지켜본 세계의 눈은 두 가지 점에서 만족하게 생각한다.
첫째는 새 헌법이「마르코스」형 장기독재의 재발을 방지 할 수 있는 장치를 모두 갖춘 민주헌법이라는 점이다.
신헌법은 대통령의 임기를 6년으로 하되 단임제 규정을 두었고 「마르코스」가 남용하던 의회 해산권을 삭제했다.
구정권의 집권연장 수단으로 사용되던 대통령의 계엄권도 크게 제한하여 그 유효기한을 30일 이내로 했다.
반정부 시위대에 발포를 일삼던 경찰군과 민병·사병을 해체하고 현역장교의 정치관여, 정년연장, 겸직 등에 대한 금지조항을 채택하여 정치에서의 민간우위원칙도 확립해 놓았다.
특히「마르코스」정치의 부패·타락의 근원이었던 족벌정치를 원천적으로 봉쇄키 위해 대통령의 배우자·친족의 고위직 임용도 금지시켰다.
신헌법의 두 번째 강점은 이 같은 민주장치 외에도 절대다수 국민의·지지를 받았다는 사실이다.
정치제도란 이론적으로 아무리 훌륭하다 해도 국민이 승복하지 않는 것이라면 정치발전이나 사회안정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
독재정치를 청산하고 평화적인 정권교체와 민주화의 길에 들어 설 때 가장 어려운 일은 국민적 합의를 얻는 헌법의 채택이다. 그 동안 새 헌법에 반대하는 세력들의 운동도 만만치 않았지만 「국민의 힘」(피플즈 파워) 앞엔 결국 무력했다.
이제 필리핀은 이 어려운 일을 무사히 치러냈다. 이제부터는 이 헌법을 수호하여 헌법정신에 따라 국정을 집행해 나가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아키노」대통령이 새 헌법에 의한 선거를 통해 당선되지 않고 현 법안에 편승하여 임기를 연장했다는 사실이다.
민주제도하에서는 헌법이 바뀌면 집권자를 새로 뽑는 것이 정상적인 관례다.
더구나 대통령책임제에서의 대통령 선거는 공개경쟁 선거를 통해 국민의 심판을 거치는 것이 상례이며 필리핀 헌법도 그런 제도를 채택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키노」여사는 이런 절차를 거치지 않고 헌법부칙으로 자기 임기를 연장 받았다.
그것은 제도로서의 정치체제와 개인으로서의 통치자를 구별치 않은 변법일 뿐 아니라 정통성확립에도 미묘한 뉘앙스를 남긴다.
「아키노」대통령이 지금과 같이 국민의 절대적 인기를 유지한다면 그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아키노」여사 앞에는 피폐한 경제의 재건, 노동자·농민의 생활개선,「마르코스」잔당과 좌익게릴라로부터의 도전 등 험난한 과제가 산적해 있다.
이런 문제가 제대로 풀리지 않을 경우 「아키노」여사는 정상적인 선거절차를 거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공연한 시련을 받을지도 모른다.
정치에서는 명쾌한 정통성의 확립이 가장 중요한 일이다. 그것은 정치안정의 제1조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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