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민당은 잘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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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일촉즉발의 위기감 마저 감돌던 정국은 신민당이 서울대회의 무기연기를 결정함으로써 한숨 돌릴 여유는 갖게 되었다.
내각책임제 개헌안의 단독발의 방침을 굳혔던 민정당이 헌특 시한 연장 가능성과 합의개헌을 위한 노력을 강조한 것과 때를 같이해서 장외투쟁으로 나가려던 신민당은 우여곡절은 많았지만 어떻든 서울대회는 연기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여야의 이 같은 움직임은 물론 「작전상 후퇴」라는 인상을 풍기고는 있으나 잘되면 여야대표회담의 성사 등을 통해 대화국면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희망적 관측마저 남게 하고 있다.
여야가 각기 한 발짝씩 물러서게 된 배경은 한마디로 극한대결을 해봤자 서로가 패자가 될 뿐 아무런 소득이 없다는 상황 판단에서 비롯된 것이라 믿고 싶다.
정부-여당이 야당의 서울대회를 공권력으로 무산시키고 예산안을 단독처리 한 뒤 내친 김에 개헌안마저 단독 처리할 움직임을 내비췄을때 많은 국민들은 정치적 파탄이 눈앞에 다가왔다는 위기감에 사로 잡혔던 것이 사실이다.
신민당을 제외한 나머지 의석만으로 내각제 개헌안을 통과시킬 수 있는 정족수는 된다. 이른바「합법개헌」은 성립될 수 있다.
그러나 개헌과 같은 국민 초미의 관심사를 처리하는데 있어서는 그 내용 못지 않게 과정이 중요하다는 것은 상식이다. 더우기 여당이 호헌에서 개헌쪽으로 방향전환을 한 까닭은 정통성 시비를 종식시키고 그럼으로써 만성적 정치불안의 원인을 제거하자는 것이었다고 한다면 개헌의 과정은 한층 중요성을 띠게 된다.
뿐더러 국민의 입장에서 보면 개헌은 권력구조나 조문 몇 개를 고치자는 게 아니라 민주화를 이 땅에 이룩하자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무리 「합법」이란 명분을 갖고 있다해 「합의」가 아닌 한은 개헌안의 단독 성립은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문제의 가중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정치현실이다.
무리는 무리를 낳고 국민의 승복을 얻어내지 못하는 무리의 악순환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민정당은 최선이 무엇인지는 잘 알지만 그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차선책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다는 논리를 폈다.
그러나 최선과 차선사이에는 너무도 엄청난 차이가 있다. 게다가 최선을 다 해보지도 않은 상태에서 차선책을 선택했다면 얘기는 사뭇 달라진다.
따라서 집권쪽이 한 발짝 물러선 것이 단순히 대 국민 홍보를 의한 작전상 후퇴라고 해도 그 의미는 심장하다.
우선 이런 완화제스처의 가장 큰 소득은 신민당내 강경파의 목소리를 낮춘데서도 찾아진다. 집권쪽이 숨돌릴 여유조차 주지 않고 강경 방침을 밀고 나갔다면 신민당은 오히려 죽기
아니면 살기식의 극한대결로 나왔을 가능성이 더 높다.
야당의 내부 사정을 보면 정국 운영의 탄력성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한층 분명해진다. 한쪽이 강하게만 나오면 다른 한쪽도 강하게 나오게 되고 당내의 합리주의자나 온건파의 설자리가 줄어들게 마련이다. 신민당의 대응전략이 그 동안 갈팡질팡한 인상을 주었지만 결과적으로 장외투쟁 연기쪽으로 결말이 난 것은 여야 모두에 좋은 영향을 줄 것 같다.
여야는 그동안 벼랑 끝까지 가본 셈이 된다. 상대방을 밀어붙일 만큼 밀어보았으면 상대방의 힘도 알았을 것이다. 거기서 얻은 결론은 아마 강경일변도의 대응이 기실 뾰족한 해결책은 될 수 없다는 점이리라 믿는다.
물론 아직은 악관보다는 비관쪽이 더 많은 국면이긴 하다. 조그맣게나마 열린 출구를 전환의 계기로 삼지 못한다면 출구는 아주 닫혀 버릴지도 모를 절박한 상황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국민여망이 합의개헌이란 사실을 명심해서 대화를 재개하고 실질대화가 이룩될 여건조성에 힘써주기를 당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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