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삶의 향기

주름살은 죄가 없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8면

기사 이미지

신예리
JTBC 보도제작국장
밤샘토론 앵커

“왜 우리나라 뉴스 앵커석이 하나같이 ‘룸살롱 구도’인지 아십니까?” 5년여 전 JTBC 개국 준비차 만났던 모 방송사 관계자가 던진 의미심장한 질문이다. “여성 앵커가 서른 살만 넘겨도 시청자 전화가 빗발쳐요. 나이 들어 보인다고, 빨리 젊은 여자로 바꾸라고.” 반면에 남자 앵커의 경우 오히려 연륜이 좀 있는 편이 선호되다 보니 앵커 구조가 ‘50대 남성+20대 여성’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거다.

‘방부제 미모’ 칭송 세태…제 나이대로 보이면 비정상?
정치도, 연기도 연륜 필요…주름은 ‘부록’으로 봐주길

그런데 이 냉엄한 현실의 벽을 갓 태어난 방송사인 JTBC가 종종 깨뜨리곤 했다. 몇 해 전 40대 초반의 동료 여기자가 주말 뉴스 앵커로 발탁됐던 게 한 예다. 당시 “서른도 아니고 마흔을 훌쩍 넘긴 여성에게, 그것도 안경까지 쓴 채 뉴스를 진행하게 한 건 국내 최초일 것”이란 기사마저 나왔던 기억이 난다. 60~70대의 여성 앵커들도 맹활약할 수 있게 판을 깔아주는 바다 건너 나라들에는 아직 못 미쳐도 작은 변화의 씨앗을 뿌린 것만은 틀림없다.

얼마 전 오랜만에 돌아온 두 명의 여배우를 보면서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 2000년대 초 통통한 몸매로 통통 튀는 매력을 뽐냈던 영화 ‘브리짓 존스의 다이어리’ 속 브리짓을 다들 기억하시는지. 10여 년 만에 3편으로 국내 관객과 다시 만난 그녀는 여전히 솔로 신세에 천방지축인 성격도 그대로지만 눈에 띄게 달라진 게 하나 있다. 바로 자글자글한 주름살이다. 인터넷엔 과거와 현재를 비교하는 사진과 함께 “세월이 야속하다”는 관전평이 넘쳐난다. 하지만 “난 여자로서 유통기한이 다 됐어” “내 난자는 이미 화석이 돼버렸을 거야”라고 푸념하는 브리짓의 얼굴이 주름 하나 없이 팽팽하다면 과연 공감하는 이가 몇이나 됐을까.

11년 만에 TV 드라마에 출연한 전도연씨 역시 연기력으로 주름 논란을 잠재운 경우다. 사춘기 자녀 둘을 둔 엄마, 대형 사고를 친 남편 때문에 마음고생을 징글징글하게 겪는 아내 역할을 실감나게 소화하면서 처음엔 “주름살이 너무 거슬린다”던 시청자 반응이 나중엔 “주름마저 연기의 일부로 보인다”로 바뀌어 버렸다. ‘시간을 거스르는 방부제 미모’나 ‘뱀파이어를 의심케 하는 최강 동안’은 광고 모델은 몰라도 연기자에겐 되려 장애가 될 수 있음을 몸소 보여준 거다.

첨단 의학의 힘을 빌린 각종 시술이 범람하면서 요즘은 제 나이대로 다 들어 보이는 게 오히려 ‘비정상’으로 통하는 세상이다. 남자도 그렇지만 여자에겐 유독 더 야박한 잣대를 들이댄다. 앵커나 배우뿐 아니라 대중의 인기를 먹고사는 정치인도 예외가 아니다. 힐러리 클린턴이 지난해 4월 유튜브 영상을 통해 “미국 국민들의 챔피언이 되겠다”며 대통령 출마를 공식 선언했을 때 엉뚱하게 외모 논란이 불붙었던 것만 봐도 그렇다. 대선 진출은 기정사실이던 터라 “힐러리가 왜 갑자기 저리 팍삭 늙었나”에 더 많은 관심이 쏠린 거다. 알고 보니 2008년 대선 도전 당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차도녀’ 이미지가 패인이었다는 반성 끝에 이번엔 보톡스를 끊고 ‘국민 할머니’로 변신을 꾀했다는 후문이다.

문제는 여성, 그것도 나이 든 여자를 지극히 혐오하는 맞수 도널드 트럼프가 기다렸다는 듯 물어뜯고 있다는 점이다. “힐러리는 대통령이 될 얼굴이 아니다” “대통령이 되기엔 스태미나가 부족하다”…. 그의 말을 종합해 보면 한마디로 그녀가 너무 늙어 보인다는 비아냥이다. 정작 힐러리보다 1년 먼저 태어난 자기 자신을 놓곤 “거울 앞에 설 때마다 35세의 청년이 보인다”고 허풍을 떨면서 말이다. 하긴 “35세 넘은 여자는 모조리 퇴출 대상”이라고 외치는 그의 입장에서야 한국 나이로 70세나 되는 힐러리가 경쟁 상대로 가당키나 하겠나.

아무리 최악의 막장으로 치닫는 미국 대선이지만 적어도 주름살이 승패를 가를 것 같진 않다. 힐러리가 정치 애송이인 도널드 트럼프에게 자랑스레 들이대는 ‘30년 경력’만 해도 실은 거저 얻어진 게 아니다. 누구든 연륜과 관록을 하루아침에 속성으로 쌓을 수 없음을 인정한다면 그 부록으로 따라붙는 주름 역시 좀 너그럽게 봐줘야 하는 것 아닐까. 굳이 인생의 훈장이라고 치켜세울 것까지야 없겠지만 말이다.

신예리 JTBC 보도제작국장·밤샘토론 앵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