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술고사의 컴퓨터 채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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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지금은 가을. 가을은 네 마음을 찢는다.날아 가라.날아 가라.태양은 산을 향해 기어 올라가며 발걸음마다 쉬곤 한다』
어느 수험생이 대학입시 논술고사에 이런 시를 인용했다고 생각해 보자. 채점자는 「F· W·니체」의 글을 인용한 학생의 사고력과 폭넒은 교양에 점수를 줄지 모른다.
이 글을 생각도, 느낌도, 추리력도 없는 컴퓨터가 채첨을 하면 과연 몇점을 줄까. 아니 검퓨터는 그것이 누구의 시인줄이나 알아 볼까.
문교부는 대학입시 논술고사 채점을 공정하고 신속하게 하기 외해 컴퓨터이용을 권장하고 있다.
문교부의 이러한 방침은 전국 교무관계자들이 참석한 교무행정 전산화 세미나에서 모대학이 개발, 소개한 논술고사채점용 컴퓨터가 객관성과 공정성·신속성면에서 좋은 성능을 보였다는 보고에 근거하고 있다.
컴퓨터 채점이 반드시 나쁜것만은 아니다. 그러나 여기서 빼놓을수 없는 전제조건은 문제를 명관식으로 내야한다는 것이다.
컴퓨터 채점의 한계는 거기에 있다. 답안지 색깔만 틀려도 컴퓨터는 식별력이 없다. 대학입시에 논술고사를 도입한 것은 주관식 출제에 의한 학생의 잠재적 능력을 테스트하려는 의도다.
따라서 논술고사는 수험생의 객관적 지식을 컴퓨터가 채점하는 일반과목과는 달리 수험생과 출제자(또는 채점자) 의 의도와 수험샘의 주관이 만나는,순수하게 인간적인 교감에 기초를 두는 것이다.
새로 개발된 논술채점용 컴퓨터가 얼마나 우수한 성능을 가졌는지 알지 못한다. 아니 알 필요도없을 것이다. 그 컴퓨터가 아무리 성능이 우수하다 해도 그것은 혼이 없는 기계에 불과하다.
사람의 사고력과 품성을 평가하고 문장력과 표현력을 알아 보는데까지 기계에 의존한다는 것은, 그것이 인간이 아닌 기계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용납해서는 안될 일이다.
현대기술문명사회를 기계가 인간을 지배하는 사회라고들 말한다. 그러나 기계가 할 일, 기계에 맡길 일과 인간이 할 일에는 분명히 한계가 있다. 사람이 바쁘다고신앙생활을 컴퓨터에 맡겨놓을 수없는 것과 똑같은 이치다.
논술고사의 채점에 컴퓨터가 동원된다면 컴퓨터 채점에 알맞는 주제가 주어지고 또 그 채점에 편리한 답안이 요구되어야 한다. 그렇게 되면 결국 컴퓨터용 논술이라는 해괴한 형식의 스테레오타입이 고착될지도 모른다. 이것은 논술고사의 본래 장도와는 정반대의결과다.
논술고사의 채점에는 그 공정성을 유지할수 있는 사전연구나 채점자에 대한 전문적인 훈련을 실시함으로써 당초의 취지를 최대한살리도록 해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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