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들 국민여망 너무 모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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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90에 가까운 노구를 이끌고 나라와 민족을 걱정하는 일념으로「나라를 위한 연합기도회」(10일 상오7시30분 서울 앰배서더호텔)에 참석한 한경직 원로목사를 잠시 만나 노안에 비친 오늘의 현실은 어떤 모습인지 들어보았다.
갑작스런 인터뷰 요청을 받은 노목사는 건강 등을 이유로 들어 거듭 고사했으나 젊은 목사들의 잇단 간청이 있자 출구로 향하던 걸음을 되돌려 식탁의자에 앉았다.
오랜만에 뵙는 것 같습니다. 개헌문제 건국대사태 김일성 사망설 등으로 시국이 어수선하고 위기감마저 없지 않은데 오늘의 나라현실을 보시고 무엇을 어떻게 느끼셨는지요.
『한마디로 난국입니다. 지금까지 느낄 수 없었던 또 다른 위기에 직면한 것 같아 정말 염려스럽군요. 극히 소수라고는 하지만 좌경화한 일부학생과 단체들의 움직임이 위기의식을 더욱 조장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게다가 김일성 피살설 소동까지 겹쳐 걷잡을 수 없는 심경입니다. 그런데도 한반도 실정을 잘못 아는 외국의 일부 기독교단체에서까지 주한미군철수를 주장하고 있으니 딱하지요』
민주화를 위한 개헌일정도 아직 그 전망이 불투명 한 것 같은데요.
『어떤 일이 있어도 여야 정치인들은 하루빨리 국회에 「합의개헌안」을 내놓아야 합니다. 오늘의 정가현실은 너무나도 국민여망을 모르는 것 같아요.
정말 자유민주주의를 신봉한다면 하루속히 이성과 침착을 되찾아야 하지 않겠읍니까. 어떤 방법으로든 합의개헌은 꼭 이룩해야 합니다』
―건국대 사태·민통련 해산 등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건국대사태는 당국의 처리과정에서 철저히 옥석을 가려 소수의 의식화된 학생을 선도하는 방향으로 나가야 합니다. 순수하게 정의로운 사회실현을 위해 정부의 잘못을 비판한 학생들까지 좌경으로 단죄해서는 절대 안되지요.
민통련은 우리 기독교 목사도 일부 관계된 단체로 알고 있읍니다. 나는 민통련에 관계한 일부 목사들이 좌경사상을 가졌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다만 현정부 시책에 깊은 관심을 갖고 사회정의 실현에 골몰하다 보니 어쩌다 과격하게 됐는지는 모르지요.
그러나 목사가 교회를 맡아 목회를 하는 일을 제쳐놓고 사회운동에만 전념하는 자세는 옳다고 볼 수 없읍니다』
최근 종교계의 정치참여가 두드러지게 나타나면서 목소리도 아주 크게 들리는 것 같습니다.
『현대국가에서는 정교분리가 원칙이지요 .그러나 교회의 사회정의를 위한 예언자적 외침이나 선언은 당연한 일이기 때문에 폭넓게 수용돼야 합니다.
교회도 사회 속에 존재하는 엄연한 현실제도의 한 부분이니까 사회적 관심을 버릴 순 없지 않겠습니까.
다만 교회의 정치참여는 「외침」과 「선언」으로 끝나야지 정치인들의 몫인 「행동」의 영역에까지 깊숙이 개입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오늘의 혼란한 시국은 그 근본 원인이 어디서 비롯됐다고 보시는지요.
『민주주의는 대중의 의사에 따라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원칙 아닙니까. 바꾸어 말하면 인간은 이성과 양심에 따라 행동해야 하고 정치도 나라도 바로 되려면 이같은 원칙을 지켜야 하지요.
위기의 시국을 야기한 군중심리에 기댄 선동과 혼란은 하루속히 냉정한 이성으로 돌아가 평화적인 토론의 광장에 서야 합니다』
오늘의 시점에서 필요한 기독교의 현실구원은 그 바탕을 어디에 두어야 하겠읍니까.
『실은 교회 일각에서도 사회혼란을 조성하는 느낌이 없지 않아요. 그렇지만 그런 기독교인은 극소수일 뿐이고 또 그들은 오래 전부터 그런 일에 관련해 온 사람들입니다. 대부분의 기독교인은 평화적인 개헌을 소망합니다.
오늘의 한국교회는 선동적인 군중심리의 악용을 막아야해요. 자유민주주의 원칙을 따르는 조용한 「합의개헌」을 통해 국민의 염원인 민주화를 이루는데 기여해야 합니다』
민주화문제와 함께 부의 보다 공정한 분배, 노동자의 권리 등이 심각한 사회문제로 제기되고 있습니다. 기독교적 근로관은 어떤 것인지요.
『기업의 부는 인간의 양심이 가름한 사회정의를 따라 공정하게 분배돼야 합니다. 특히 기업인들은 경제발전의 이익을 근로자와 함께 나누어 갖겠다는 정신으로 임금시책을 펴나가야 해요.
또 근로자는 기업 없이는 경제성장이 안 된다는 점을 명심하여 기업에 손해를 주는 무리한 요구를 하지 말고 잘 협력해야 합니다.
임금 복지의 문제는 고용주와 노동자가 양심을 버리지 않는 당당한 협상을 통해 해결하는 관습을 쌓아나가야겠지요』
―평소 생각해오신 지도자의 요건은.
『지도자는 우선 공사간에 깨끗해야 합니다. 사생활에서 까지도 남의 비방을 받아서는 절대 지도자가 될 수 없다는 게 나의 확고한 소신이지요. 둘째로는 남을 받드는 봉사정신이 투철해야겠습니다. 세번째는 「정의감」이 강해야합니다.
지도자는 이밖에도 외유내강의 덕성을 지녀야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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