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의 소리글자·뜻글자 함께 쓰는 우린 복받은 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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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시와 한문시가 어우러져 독특한 아름다움과 신비한 깊이를 만들어냅니다. 한글·한문 모두 구사할 수 있는 한국어 사용자만이 느낄 수 있는 짜릿한 감동이지요.”

『꽃씨 하나…』 낸 김병기 교수
김일로 시인 시집 『송산하』 번역 해설
한자 어렵다는 건 편견, 3000자면 충분

한글과 한문의 계합(契合) 시집 『꽃씨 하나 얻으려고 일 년 그 꽃 보려고 다시 일 년』(사계절·사진)을 펴낸 김병기(62) 전북대 중어중문학과 교수는 “소리글자 한글과 뜻글자 한자의 장점과 매력이 서로 보완하며 상승하는 효과가 나타난다. 책에 수록된 시의 맛을 느끼며 한국어 안에서의 한자의 가치를 깨닫게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꽃씨 …』는 ‘계합시’ 를 처음 쓴, 전남 광주 지역 1세대 아동문학가 김일로(1911∼1984) 시인의 시집 『송산하』를 김 교수가 ‘역보(譯輔·번역하고 보충 서술)’한 책이다.

시의 형식은 그가 “한국 시의 새로운 장르”라고 평할 만큼 독특하다. 짤막한 한글시 뒤에 한 줄짜리 한문시가 붙어 있다. 표제시의 전문은 ‘꽃씨 하나/얻으려고 일 년/그/꽃/보려고/다시 일 년/一花難見日常事(일화난견일상사)’다. 김 교수는 이 시의 한문시 부분을 ‘꽃 한 송이 보기도 쉽지 않은 게 우리네 삶이련만’으로 번역하고, “자연의 엄숙한 순환성을 말한 시로 이만한 시가 또 있을까”란 감상을 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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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기 교수.

김 교수는 1996년 즈음 충남 예산 수덕사 운수암 부근 찻집 벽에 걸린 서예 작품에서 이 시를 처음 접했다. 강한 충격을 받아 내친 김에 시집 『송산하』를 구해 읽었고 “한글시와 한문시의 계합에서 오는 이 오묘한 느낌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싶다”는 마음에 번역을 시작했다.

그가 꼽는 ‘계합시’의 매력은 “한글시와 한문시가 내용은 같아도, 가슴에 와닿는 느낌은 사뭇 다르다”는 것이다.“한문시를 통해 한글시의 의미가 더욱 강렬하게 전해진다”고도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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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로 시인의 시를 김 교수가 쓴 서예 작품이다.

김 교수는 『아직도 한글 전용을 고집해야 하는가』『북경인가 베이징인가』 등의 저서를 통해 한글 전용 정책을 비판하며 “한자를 우리 문자로 정착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꾸준히 펼쳐온 학자다. “자기 역사를 기록한 글자를 읽지 못하는 민족은 ‘문맹’”이라며 “한자를 읽는 능력이 없으면 앞으로 닥칠 역사 전쟁에서 중국의 공세를 감당하지 못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글자 하나 살짝 바꿔 역사를 왜곡시킬 때 속수무책 당한다”는 것이다.

그는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인 소리글자인 한글과 가장 발달된 뜻글자인 한자를 동시에 사용할 수 있는 복 받은 나라”라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 “한글과 한자를 함께 사용함으로써 더 웅숭깊은 미를 구현할 수 있다는 것을 김일로 시가 보여주지 않느냐”면서 한문 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한자 공부가 어렵다는 건 편견이다. 3000자만 외우면 충분하다. 대학생들을 가르쳐보니 여름방학 한 번이면 끝나더라”“현재 사교육을 통해 이뤄지는 단어 외우기 위주의 급수 따기 학습법으로는 안된다. 문장을 통해 놀이처럼 가르쳤던 조선시대 한자 교육법이 빨리 복원돼야 한다” 등 그의 목소리엔 사명감이 가득했다.

이지영 기자 jy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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