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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여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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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대평원은 아직 어둠에 묻혀있었다.
초원을 쓰다듬고 스쳐온 바람이 멀고 먼 산맥 기슭의 숲을 향하여 미끄러져 갔고 바람 소리는 차츰 뚜렷하게 커져갔다. 그리하여 늪과 소택지에서 피어오른 안개가 풀잎과 여린 들꽃들을 적시면서 들판을 지나 언덕과 산 가녘을 감돌기 시작했다. 가끔씩 짖어대던 짐승들의 울부짖음도 가라앉고 새들은 아직도 둥지에 틀어박혀 날개 깃속에 부리를 처박고 있었다.
둥글게 펼쳐진 위와 아래의 어둠곳곳에 잔광(잔광)이 뿌려져서 물살에 선명히 드러났다가 차츰 바래어가는 천의 무늬처럼 그빛이 변하는 중이었다. 별빛은 일순 또롱또롱 해졌다. 별을 담고있던 검은 어둠은 처음에는 저춥고 메마른 이끼의 나라에서부터 불어오는 대륙풍이 차츰 거세어갈수록 한꺼풀씩 벗겨지는 것같았다. 어둠이 벗겨지면서 별마저 한낟 두낟씩 스러지고 회색 화강암 속속들이 드문드문 빛나는 모래알처럼 몇점씩 남은 별들만이 박명속에 버티고 있었다. 달은 광막한 지평선 저쪽 먼산맥의 희미한 자취뒤로 숨으려는 참이었다.
어둠 가운데서 길다란 띠가 생겨났다. 새벽 바람과 더불어 빛의 띠는 길어지고 차츰 번지면서 대지와 산봉우리를 두루 살피는 한아비의 눈길이 틔어가고있었다. 새들의 울음 소리가 먼초원에서 들려왔고 바람 소리 속에는 강과 여울이 기슭의 바위와 절벽이며 모래를 건드리고 휘감고 치고 적시고 헤적이는 물소리가 콸콸 쿨럭쿨럭 철썩 처르르르 찰랑찰랑 하면서 전해져왔다. 그 빛의 전조는 대지를향하여 깨어라 아가들아, 하는 속사임처럼 부드럽고 포근하게 퍼져갔다.
서쪽으로 대흥안렴(대흥안령)산맥의 푸른 자취 위로 간신히 걸린 달과 이제 막 송화강 건너강백산맥 (외백산맥) 뒤에서 솟구치기 시작하는 해는, 거칠고 풍요로운 대지의 들판과 강과 골짜기와 봉우리 그리고 나무 숲과 풀밭과 황야의 짐승이며 벌레들까지도 함께 어루만져 주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손길과도같았다. 달 지기 직전, 그리고 해가 막 띠오를 무렵, 가장 깊어진 어둠과 가장 새로운 밝음이 머리와 꼬리를 맞대고 대지와 하늘을 감싸면서 만나는 것이 아닌가. 조화의 아름다움이 저 너른땅의 끝과 끝에서 만날제, 새들은 평원의 하늘 위로 나직하게날아 다니며 고즈너기 울었고 어디선가 사람이 사는 숲의 나무들사이로 가느다란 실연기가 오르고 산 것들이 서서히 깨어 가는 소리가 가득차기 시작했다.
날이 밝는다. 부연 띠가 좀 넓어지고 그 위로는 진보라 빛의동녘이 층을 이루며 잠식하고 있었으며, 띠가 황금색에서 꼭두서니의 붉은 색으로 물들면서 진보라는 분홍과 주황색의 차례로 물러났다. 산맥의 연봉들은 검푸른 색이 짙어지더니 머리들만이 발갛게 드러나 허공에 떠있었고 구름과 봉우리들이 무르익었다. 빠알간 해가 머리를 내밀자마자 강물과 당은 뚜렷한 선을 그으며 갈라섰고 물 위에 빛의 반점들이 아우성처럼 일시에 가득히 떠올랐다. 뭉클거리는 붉은 빛 가운데 섞여있던 해가 쑤욱 솟아 오르면서 층층이 번진 빛들을 지워 버리며 빠알갛게 드러났다. 초원과 습지가 푸른 빛과회색 빛으로 갈라서고 갈색땅의 부드러운 가슴팍이 주욱 펼쳐졌다. 산의 전나무 가문비나무 박달나무 잣나무와 숲의 자작나무 떡갈나무 사시나무 느릅나무들의 늠름한 가지가 합창하듯이 발을 모아 위로 죽 뻗치는 것 같았다. 산줄기는 맥맥 봉봉이 꿈틀꿈틀 획돌아 흘렀다가 힘껏 삐치고 다시 스을쩍 굽어져 넘고 넘어흐느적이다 또한 치솟아 가파르게 허위허위 오르다가 또 다시축 처지면서 광야로 숨는 것이었다. 새벽에서 아침으로 그리고 다시 여명으로 되돌아 가는 노정이 되풀이 되는 중이었다.
아득하게 먼 하늘로 소흥안령 산맥을 넘어가는 새의 무리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풀밭과 숲에는 사슴과 멧돼지의 떼가 먹이를 찾아 이동하고 있었다. 혹독하고 매서운 겨울이 지나가고 땅은 풀려 발해만을 거쳐온 훈훈한 바람이 초목을 살랑살랑 건드릴 무렵이오면 사람들도 제 각각의 무리를 이루어 짐승들을 따라 이동하게 마련이었다.
그러나 험한 산곡과 고원에는 아직도 찬바람이 매섭게 몰아쳤고 눈도 두텁게 쌓여 있었다. 기슭의 개천과 폭포들만 겨우 녹기 시작하여 가냘픈 물소리를 내고 있을 뿐이었다.
평원에서는 흰 수염의 명상에 잠긴듯한 밝은산이 구름사이를 헤치고 하늘 복판에 아득히 떠 있는 것을 어디에서나 볼 수가 있었다. 산은 구름속으로 사라졌다가는 다시 하얀 얼굴을 어렴풋이 드러내곤 했다. 밝은산은 장백산맥의 머리산이었고 이는 저 광활한 땅의 동쪽에서 날마다 찬란한 해를 띠올려 보냈으며, 초원과 평원에서 바라보느라면 잠자던 해가 밝은산의 집을 띠나 뒤쳐나오는 것처럼 보였다. 언제나 광야의 아득한 저쪽 끝에 구름사이로늙은 은자 (은자) 같은 밝은산의모습이 보이던 것이다. 산의 꼭대기에는 천하에 생명수를 쉬임 없이 내려주는 성스러운 하늘못이 있었다. 끝간데 없이 검푸르게 괴어있는 물속에도 못가의 바위굴에도 이 산의 정령이 살았다. 가끔씩 잠을 자던물 속의 청룡이 뒤척일 때마다 산과 바위가 흔들리고 물이 부글부글 끓었으며 그 울림은 동북쪽의 흑룡강 한가람에까지 전해져 물이 치솟아 들끓었다. 못가의 바위굴 속에는 산과 숲의주인인 흰범이 살았다. 범은 메마른 만주의 누런 흙빛이었으나 털갈이를 할때에는 퇴색한 허연털로 갈아 입었고 짙은 칡 무늬의 얼룩 띠는 연한 갈색으로변하였다. 흰 산의 흰범은 하늘속에 떠 있는 산과 똑같은 모습이었다. 범은 황소 세마리를 합친 것보다 더 컸다. 그의 울음소리가 땅거미가 깔리기 시작한 봉우리 사이로 울릴제면 사방은 일순 정지된 듯이 모든 움직임과 소리를 스스로 죽여 버리고 말았다. 그가 눈 속에서 늠름하게 섰을적에는 흰 범, 숲에서 뛰어 다닐제는 칡 범이라고 불렀다. 밝은산 범은 배가 고프지않으면 함부로 다른 짐승들을 해치지 않았다. 힘 세고 당당한 먹이만을 골라서 잡아 먹었다. 범은 서쪽으로 대초원의 입구까지 그리고 동으로는 잠자는 대륙의아무르 강까지 오르내렸고 남쪽으로는 밝은산의 연맥이 흘러 내려간 아름답고 온화한 반도에까지 드나들었다. 바다가운데로뻗어나간 이 아늑한 땅은 사실 칡범의 고향이었다. 범은 짐승의 무리를 따라 대지의 북쪽 끝에까지 긴 여행을 떠났다가도 언제나 겨울이 되면 밝은산으로 되돌아왔다. 그리고는 얼어붙은 강을 뛰어 건너 반도의 산하를 한바퀴 돌아 보고는 밝은산의 언저리에서 긴 겨울을 보내곤 했다.
밝은산 골짜기와 삼림에는 어쩌다가 저희들 무리를 띠난 늙은 사람이 나타나곤 하였다. 그들은 사냥도 밭갈이도 아무런 일도할수 없게 된 노인들이었는데 마지막으로 햇님의 품에 안겨 하늘로 올라가기 위하여 산정을 바라고 오르는 것이다. 노인들은 까마득한 옛날부터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해가 솟아 으른다는 성스러운 못에 관한 전설을 자세히 들어왔었다. 밝은 산 성역에는 아무에게도 오르는 일이 허락 되어있지 않았으나 이승을 떠나려는 사람은 언제나 갈 수가있었다. 노인들은 병들고 쇠약해지기 전에 차라리 이승을 떠나 신들의 세상에 가기 위해 아무도 몰래 길을 떠나는 이들도 있었다. 들판의 젊은 전사들은 밝은산 흰 범을 먼발치서라도 보게되면 까마득한 옛날에 산정으로 찾아간 어느 한아비가 돌아오신것으로 알았다.
현명한 노인처럼 흰 범도 자신의 정결한 시신을 더러운 풀숲의 벌레에게 함부로 내주지 않았다. 늙고 쇠약해진 흰 범도 하늘을 오르려면 눈 덮인 밝은산의 꼭대기로 올라가 성스러운 연못의 물을 마시고 햇님의 품에안기는 법이었다. 북녘의 잠자는 대륙 끝에까지 멧돼지의 무리를 따라갔던 흰 범은 수십년 동안 밟고 다녔던 이 거칠고 정결한땅에 다시는 돌아올수 없다는 걸 잘 알았다. 그는 장백산맥을 향하여 강을 건너고 바위를 뛰어 넘으면서 이제는 어서 하늘못에 가서 쉬리라고 작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입에서는 헐떡이는 입김이 솟았고 목덜미 아래로는 길고 흰 갈기털이 바람에 나부꼈다.
범은 능선을 타고 달렸다. 멀리 숲의 바다가 암벽 아래로 끝도 없이 계속되고 있었는데 숲의지평선 끝에 푸르스름한 몸과 흰머리를 드러낸 밝은산의 푸근한 자태가 떠올라 왔다. 범은 숲을 지나고 다시 초원 지대로 들어섰다. 밤이 되자 작은 짐승들과 맹수들이 제각기의 영토에서 일어나 활동을 시작했고, 흰범도 북으로 이동중인 사슴 무리를 노리고 접근해 갔다.
그 중에서도 몸집이 미끈하고 근육은 참나무 같이 탄탄하며 향나무의 구불텅한등걸 같은 멋진 뿔을 가진 머리사슴에게 달려들어 앞발로 쳐서 짓눌렀다. 사슴 무리는 모두 달아나버리고 흰범은 뒷다리부터 천천히 먹었다. 주변 숲속에는 흰범이 남길 찌꺼기를 노리고 작은 맹수와 날것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가지 사이로 이리저리 어지럽게 낱아 다니는 새들의 지저귐이 점점 시끄러워졌다. 범은 귀찮고 번거로와져서 대충먹기를 끝내자마자 이 숲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밝은산 흰범이 죽은 사슴에게서 돌아서자마자 뭔가 희끗희끗한 짐승들이 나무 뒤에서 나타나 접근해 왔다. 털은 거칠게 일어나고 갈비뼈가 드러나도록 바짝 여위었으나 길고 튼튼한 턱과 날카로운 이빨을 번뜩이고 있었고 눈은 파랗게 빛났다. 그것은 서쪽 초원지를지나고 대흥안령 산맥을 넘어 척박한 황야의 고원 저쪽에서 이동해온 회색 이리들이었다.
흰 범은 그것들을 거들떠 보지도 않고 천천히 자리를 뜨고 있었다. 이리들은 몹시 거칠고 성급했다. 큰 무리였고 굶주려 있었다. 이리 떼는 겁도 없이 흰 범의 앞을 가로막으며 죽은 사슴의 남은 고기를 향하여 달려들었다. 흰 범과 진로가 엇갈리면서 맞부닥친 몇 마리의 이리가 멈칫하면서 겁도 없이 나직하게 으르릉거렸고 흰범노인은 버르장머리를 고쳐 주려고 그 중의 하나를 앞발로 쳐올렸다. 맞은 이리는 대번에 허리가 부러지며 내동댕이 질 쳐졌고 다른 이리들은 동류의 몸 위에 덤벼들었다. 이리의회색 털에 피가 묻었다. 범 노인은 흥분한 이리들을 꾸짖듯이한번 크게 호통을 쳤다. 그러나 회색 이리들은 흰범이 노인임을 알아 보았고 해볼만하다고 느꼈던지 머리 이리가 먼저 나섰다. 이리 떼는 흰범을 겹겹으로 둥글게 둘러쌌다.
싸움이 시작되었다. 범은 앞발로 이리를 쳐내기도하고 날카로운 칼 이빨로 물어 던지기도 했지만 이리떼는 계속해서 달려들었다. 흰범의 털은자신의 상처에서 흘린 피와 이리들의 피로 벌겋게 더렵혀졌다. 범의 발 밀에는 죽죽은 이리들의 시체가 너저분했고 부상한 이리들은 분노로 눈이 이글이글 타는 듯했다. 이리들이 밤을 찢으며 드높이 울고 있었다. 광야와 골짜기에서 이리떼가 계속 몰려들고 있었다. 흰범 노인은 온몸에 상처를 입고도 물러나지 않고 싸웠다. 다른 이리들은 죽어넘어진 동류의 시체를 뜯어 먹기도 하고 다음 공격에 섞이기도 하면서 점점 더 악착스러워졌다. 범노인은 이리들을 물고 치고 던지면서 초원 지대를 벗어났다.
날이 훤히 밝아오고 있었다. 해가 뜨자 이리 떼는 뿔뿔이 흩어졌기만 초원은 피투성이가 된 이리의 살점으로 처참했다. 평화로운 작은 짐승들은 숨도 쉬지않고 숨어 있었으며 강변의 억새와 갈대들까지도 숨을 죽이고 있는 것처렴 보였다. 흰 범노인은 멀리 보이는 밝은 산을 향하여 터벅터벅 걸었다. 강가에서 물을 마시고나니 다시 기운이 나는 것 같았다.
흰 범은 몇날 며칠 밤을 달러갔다. 밝은 산의 다정한 아랫자락에 이르렀을 때 폭풍이 불어와 눈보라가 거세게 몰아쳐서 범은 몇번이나 바위 아래에서 쉬고는 하였다. 깊고 긴 골짜기를 지나가다 흰범은 이 길목에 침입자가 있다는 눈치를 챘다. 그는 바위 위로 올라가 저쪽이 나타나기를 조용히기다렸다. 그것은 동북쪽의 눈과얼음의 나라에서 온 갈색곰이었다. 밝은산 골짜기에 터잡고 사는 몸집이 작은 검은 곰과 그보다 큰 불곰도 있었지만, 얼음의 나라에서 오는 갈색 곰은 몸집이 거의 흰범과 다름 없는 크기였고 뒷발을 딛고 일어서면 언덕이 생겨난듯이 보였다. 흰범은 위에서 아래로 뛰어 내리면서 갈색곰의 뒷덜미를 물었다.
갈색곰은 온몸으로 진저리를 치면서 나무등걸과 풀숲을 마구 짓밟고 부딪치며 길길이 뛰었다. 범이 곰의 몸에서 떨어졌고 둘은 서로마주보며 섰다. 곰이 위에서 범을 덮치기 외해 상체를 일으키며 두발을 번쩍 쳐들었는데 흰범도 위로 일어나면서 앞발로 곰을 치면서 엇갈렀다. 곰은 코와 면상이 크게 찢어졌으며 범은 어깨에 깊은 상처를 입었다. 곰이 상체를 떨어뜨리고 둔하게 방향을 돌릴적에 흰범은 다시 잽싸게 곰의 등을 덮쳤다. 범은 곰의 두툼한 목덜미를 한입에 물고 이빨을 깊숙이 박아 죄었다. 다시 곰의 몸부림이 반복되었지만 범은 강력한 앞발로 곰의 어깨를 짓눌렸다. 곰이 헐떡거리기 시작하면서 차츰 힘을 잃어가더니 다리에서 뻣뻣하던 기맥이 사라지고 축 늘어졌다. 흰 범은 밝은산의 침입자를 짓밟고 서서 한번 크게울었다. 범도 이 두번째의 싸움에 많이 지쳐있었다.
눈앞에 허연 안개가 가리운듯 주위가 흐려졌고 갈색 곰에게서 입은 상처에서는 계속해서 피가 흘러 내렸다. 흰 범 노인은 어서 밝은산 하늘 못가로 가야한다고 생각했다. 흰 범은 차가운 눈을 헤치고 산정으로 오르다가 곰과이리의 피로 얼룩진 털을 정결한 눈밭에 비벼대어 낚아냈다. 흰범은 햇님의 품에 안기기 위하여 비틀거리며 하늘 못으로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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