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악화·외교고립 다급해졌다|김일성 왜 소련에 가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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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85년 말부터 모스크바 외교 가에 끈질기게 나돌던 김일성의 소련방문 설이 거의 10개월만에 사실로 드러났다. 김일성이 84년5월 소련을 방문한지 2년 도 채 못돼 그의 방문 설이 오랫동안 나돌았던 것은 그만큼 그 필요성에 대해 북한·소련 양측에 의해 검토돼 왔다는 것을 뜻한다.
그 동안 양측이 검토해 온 방문 필요성은 우선 경제적인 측면과 한반도 주변을 둘러싼 북한·중공·소련의 3각 관계의 두 가지로 나눠 추측할 수 있다.
경제적인 측면을 첫 번째 이유로 꼽는 것은 지난해 말부터 김일성이 소련방문을 희망할 만큼 북한의 경제사정이 절박했다는 조짐이 여러 면에서 드러났기 때문이다.
북한의 경제사정이 얼마나 절박한 가는 북한의 제2차 경제7개년 계획이 84년에 끝나고도 아직까지 제3차 계획을 발표하지 못하고 있다는데서 드러나고 있다.
소련 측 발표에 의하면 북한은 주요생산품의 40%, 전기제품 60%, 석유제품 45%가 소련의 지원을 받고 있을 만큼 대소 의존적이다. 낙후된 북한의 공업기술수준, 막대한 외채상환지연에 따른 대외무역 악화, 침체에 빠진 북한경제를 운영하기 위해서는 따라서 소련의 지원 없이는 불가능한 형편이다.
더욱이 지난 3일 중공국가 주석 이선념이 평양을 방문했을 때 중공으로부터의 경제원조를 기대했으나 별 호응을 받지 못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두 번째 이유는 물론 한반도주변을 둘러싼 정치·군사적인 정세변화다. 10개월 동안 방문교섭이 진행되다가 어째서 현재와 같은 시기가 선택됐는가 하는 것도 주목할 만한 일이다.
최근 빈번해진 한국-중공교류에 따른 북한-소련의 우려, 미-중공의 접근에 따른 우려라는 면에서는 이를 어느 정도 견제해야 한다는 데는 북한-소련의 이해가 일치한다.
특히 아시아태평양지역에서 미국이 거의 독점하다시피 하고 있는 경제·군사적 이익에 대해 전통적인 남진정책을 추구하고 있는 소련에 북한은 동북아시아 지역에서 유일한 발판이다.
미그-23기의 제공, 남포항의 소련함대기항 허용, 소련장거리 폭격기의 북한 영공통과 등도 그런 면에서 소련의 아시아전략에 중요한 기능을 갖고 있다. 북한은 이러한 소련에 대한 편의 제공 대가로 경제원조를 기대하는 한편 미국과의 관계를 긴밀히 하고 한국과의 비정치적 분야에서의 교류를 확대하는 중공에 대한 견제 효과를 노리고 있다.
특히 북한-중공관계는 최근 수년간, 특히 83년 중공 민항 기가 한국에 착륙한 이래 두드러지게 불편해져 왔었다. 북한은 북한대로 빈번해지고 있는 한-중공 교류에 불만을 품어 왔고 중공은 중공대로 북한-소련의 밀착되는 군사관계에 불만을 품어 왔다.
특히 중공해안에서 불과 3백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남포항의 소련군함기항 허용은 중공에 대한 군사적 도발이나 다름없는 행동이었다.
물론 북한에도 오는 11월 미 군함 3척이 중공의 청도 항을 방문한다는 발표도 도발적으로 비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청도 항 역시 북한을 지척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소련의 동아시아전략에서 볼 때 이 시점에 김일성을 모스크바에 맞아들이는 것은「고르바초프」의 새로운 외교정책이 구체화되는 시험적 단계로 볼 수 있다. 그는 지난 7월 시베리아지역을 순방하며 아시아 태평양지역에서 미국의 독점적 지위를 인정 않겠다는『소련도 태평양 연안국가』 라는 정책을 발표했다. 「그로미코」의 소련외교가 상징해 온 미-소 관계 편중외교에서 전환을 모색해 온 그의 외교정책에 따라「고르바초프」이후 북한-소련 접촉이 빈번해 졌던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북한으로서는 소련의 이러한 외교적 필요성에 어느 정도 부응해 가며 한반도 정세를 자기네에게 유리하도록 소련의 협조를 구하리라는 것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86아시안게임 성과에 따라 88년 서울 올림픽성공전망이 확실해지면서 소련을 비롯한 동구 공산권 국가들의 참가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도 북한을 불안하게 하고 있다. 김일성으로서는 소련 지도자들과 88올림픽에 대한 북한입장의 지지를 모색하리라는 것도 추측할 수 있다.
물론 이미 중-소 양국에 기정 사실화 되다시피 한 김정일의 후계자 세습문제를 직접 확인하는 계기도 될 것이다.
이처럼 실질적으로는 대소 의존적이지만 지금까지 북한체제 존립의 근거로 삼아 온「자주성」과「주체」라는 맥락에서 볼 때, 또 북한의 지정학적 위치로 볼 때 중-소 등거리 외교라는 원칙은 명목상이나마 유지해 나갈 것으로 보인다. <김동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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