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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갑나기 최고수의 반상곡예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0면

흥미만점의 바둑이다. 백을쥔 쪽이 반드시 이겨서 백번필승이라는 말이 널리 퍼졌다. 반집승부가 두번 있었고 왕위가 두판을 역전패 했으며 도전자가 세판을 역전패 했다. 우세하게 판을 짜 나가던쪽이 꼭 마지막에 뒤집어지는 현상이 일어났다.
16기때 조9단이 서왕위와 대결, 왕위에 올랐을때도 7국까지 갔고 역시 서8단이 도전자였던 지난해에도 7국까지 가서 반집으로 뒤집어졌는데 올해에도 7국까지 왔다. 이 한판의 바둑이 내년도까지 생각하면 4천만원이 걸린 큰 승부라고 한다.
조왕위가 이 판을 놓치면 2년연속 1억원 돌파의 기록이 깨지고 서8단이 이기면 그 여세를 몰아서 3∼4개의 다른 타이틀까지 빼앗아올 것이라고 한다.
10분쯤 늦게 대국장에 도착해보니 바둑은 이미 12수가 진행되고 있다. 빠른속도로 진행되던 바둑은 코피가 들어오고부터 느려지기 시작했다. 대국실도 작년의 그방이다. 운당여관 청실.
『전형적인 실리바둑으로 단단하게들 두고 있군요. 서8단이 종반이 약하므로 조왕위는 지구전으로 끌고 가려는 작전인것 같습니다.』
옆방의 검토실로 갔더니 김수영6단이 말했다. 왕위와 도전자를 비교해보는 것도 재미있다. 10년을 넘게 한국바둑의 수레를 끌고가는 두 바퀴인 동갑나기의 최고수들이다.
하나는 일찌기 일본에서 정통수업을 받은「십구로의 마술사」이고 하나는 국내에서 다져진「무사독학의 야생마」이다. 왕위는 술을 못하는 대신에 줄담배이고 도전자는 담배는 보통인 대신에 술이 세다. 왕위는 정기적인 등산으로 체력을 다지며 도전자는 국선도장에 사흘나간 것을 빼놓고는 특별한 운동이 없다. 체력은 곧 기력인 것일까.
세평은 서8단의 약점을 종반으로 본다. 초반에 기선을 잡아서 중반까지 잘 밀고 나가다가도 끝까지 버텨내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7국까지 오게된 이번의 바둑만 해도 그렇다. 3승의 고지에 먼저 올라서고도 결국 마지막판까지 오게된 것이다.. 도전자가 우세하게 판을짜고 있다해서 하는 김수영6단의 말이 재미있다.
『서8단이 이 바둑을 이기면 5년만의 왕위복귀가 됩니다. 서8단이 왕위였던게 꼭 5년전과 10년전입니다. 바이오리듬이라는게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허허.』
다시 대국실로 들어가 본다. 바둑은 벌써부터 중반전의 난소로 접어들고 있다. 왕위는 벌써 세갑째의「장미」를 뜯고 있다. 무릎을 세우고 세운 무릎위에 턱을 올려놓고, 그리고 다시 무릎을 풀면서 냉수를 마신다. 도전자는 척추를 꼿꼿이 편 자세로 반면을 응시하고 있는데 간헐적으로 기침을 한다.
혈색이 없는 얼굴이 피로해 보인다. 호주를 다녀온지 20일 밖에 안된다고 한다. 이틀에 한판 꼴로 그동안 밀렸던 대국을 치르다보니 바둑한판에 체중이 꼭 1㎏씩 준다고 한다. 바둑은 분명히 도전자쪽이 좋은데 예감이 안좋다. 오후 대국이 시작되고 부터는 관전객들이 몰려들기 시작하였다. 바둑계의「떠오르는 별」인 유창혁2단은 벌써부터 김수영6단과 검토를 시작했고 양재호5단과 임선근4단이 자리를 함께 했다.
뒤를이어 작가 김원일씨가 들어왔는데『10년 동안 벼르기만 하다가 큰마음 먹고 왔다』고 했다. 점심으로는 된장찌개를 먹었는데 판이 불리하기 때문일까, 왕위는 한마디말이 없었고 도전자는 명랑하게 관계자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후대국부터는 착수가 더욱 신중해져서 평균 15분에 한수꼴이었다. 궁금증이 일어나서 대국실로 가보았더니 뜻밖에도 대국자가 보이지 않았다. 잠시후 두사람은 얼굴의 물기를 닦으며 방으로 들어왔는데, 연신 재채기를 하는 것이었다. 어디서 최루탄이 터져 바람에 날려와 모두가 괴로워 했다.
어둠이 깔렸다. 유창혁2단이 집으로 돌아간 뒤로 기사들은 고개를 흔들었다.
도전자가 덤을 낼 수 없다는 것이었다. 모두들 대국실로 몰려가는데 김수영6단이 탄식처럼 중얼거렸다.
『끝까지 백번필승이구나. 돌을 가려서 조왕위가 백이 나오는 순간 운명은 이미 결정되었구나.』
대국장 밖에는 가을밤비가 내리고 있었다.

<◇작가·아마4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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