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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력성장 걸맞게 대범했으면|여동찬<외국어대 교수>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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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지난 25일에는 전날 밤에 진행되었던 체조경기와 남자탁구경기의 명 승부를 지적하면서 필자는 드라마 같은 기쁨과 감동을 함께 했다고 했지만 그 다음 날 밤에 열린 여자탁구경기를 지켜보는 순간에는 기쁨도 감동도 훨씬 더했다. 그리고 30일 저녁 탁구의 천재 유남규의 경기를 볼 때 나는 한국을 다시 한번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한국의 양영자·현정화와 유남규 선수들은 정말로 중국선수들이 무기력하게 보일 정도로 멋진 경기를 하면서 세계정상답게 탁구의 정수와 묘기를 보여준 것이다. 중국이 그렇게까지 무기력하게 무너질 것을 아마 예상한 사람은 한국에도 별로 없었을 것이다. 최선을 다하고 한국인의 자랑이 된 이 선수들에게 나는 꽃다발을 보내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체조경기장에 가서 선수들의 묘기를 보면서 나는 우선 한국인들의 체육에 대한 관심과 우리선수들의 노고로 말미암아 한국이 얻게 된 훌륭한 성과를 확인할 수 있었다.
체육에 대한 한국인들의 관심은 열광에 가까운 것이며 경기장에서 관중이 한 마음으로 뭉치는 것을 쉽게 느낄 수 있는 것이다.
하나 이런 일체감은 과연 강력한 한국을 건설할 만큼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나타날 수 있을까. 놀라운 성과를 얻는 선수들의 피눈물나는 훈련을 상상하면서 나는 또한 일부 한국대학생들이 보여주는 정성스럽지 못하고 안일한 자세에 아쉬움을 느낄 도리 밖에 없었다.
저력이 있고 우수한 두뇌를 지닌 이 젊은이들도 금메달에 도전하는 선수들처럼 최선을 다한다면 우리들의 장래는 얼마나 밝을까.
체육경기를 관전하는 한국국민의 열광적인 관심은 또한 타국을 배척하는 맹목적이고 배타적인 애국심으로 변하기 쉽다. 한국선수들의 기량을 확인하고 그들의 묘기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면서도 수많은 외국인은 이 점을 지적하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88년에 서울에서 개최될 세계의 올림픽 대회를 훌륭하게 치를 수 있을 것 같다.
한국선수들의 기량이 향상됐다는 것, 이 나라의 국력이 여러 분야에서 급속도로 성장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긴 하지만 지금으로부터 타국에 대한 아량도 성장했으면 한다. 왜냐하면 아량의 부족이란 여유가 없는데서 생기기 때문이다. 나는 무엇보다도 국력의 성장에 떨어지지 않는 국민과 보도기관 종사자들의 대범함을 바라는 것이다.
한국국민이 지나치게 흥분하고 자신의 성공에마저 압도되는 것으로 보인다든지 지나치게 자화자찬한다면 남들로부터 받을 칭찬을 받지 못할 뿐 아니라 오히려 거부반응을 불러일으킬 위험마저 있는 것이다.
어떻든 간에 나는 한국대표선수들이 지금까지 얻어낸 놀라운 성과를 진심으로 축하하고 대회가 끝날 때까지 더욱 선전해 주기를 바란다.
그 동안 나는 여러 외국인들을 만났는데 그들과 대화를 나눈 것으로 미루어 생각컨대 이번 아주 경기대회는 경제적인「한강의 기적」에 버금할 정도로 국위선양에 크나큰 기여를 하는 「서울의 기적」 이라고 해도과언이 아닐 듯하다.
그러나 점령한 고지를 지키는 것은 어려운 법. 체육계의 별들 치고 항성이란 별로 없으니 앞으로 더욱 노력해야 이번에 이룩한 기적을 살릴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승리감에 도취되어 너무 쉽게 외쳐지는「하기만 하면 된다」는 말은 한국에만 통할 리가 없다.
일본의 여자배구도 하기만 하면 한국의 여자배구를 이길 수 있는 것, 인도네시아의 정구도하기만 하면 한국의 선수들을 능가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이 사실을 기억해야 「탁구의 무대는 우리의 무대」가 되고 국체대회에 나가서 우리선수들은 계속 여러 종목에서 훌륭한 성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월계관이란 승자의 머리에 얹어 주는 것이나 이를 베개 삼으라는 것이 아니다. 한때의 성공에 만족하지 말고 더욱 전진하라는 격려로 생각해야 끝까지 성공하는 것이다.
이번에 우리는「만리장성을 허물어뜨렸다」고 수십 번 외쳤으나 중국인들은 저력이 있는 사람들이니 무너진 것으로 보이는 만리장성은 분명히 재건될 것이다.
그리고 새로 건축될 그들의 만리장성은 아마 과거의 건축물보다 높기도 하고 두껍기도 할 터이니 한국선수들은 이를 돌파할 만한 능력을 갖추도록 다시 한번 노력해야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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