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향숙의 『그물 사이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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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소설은 부르좌의 서사시다」라는 말은 소설이론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매우 낯익은 문장이다. 「헤겔」이라는 박학다식한 철학자가 무수히 많은 방면에 대해서 이야기하다가 지나가면서 한마디 한듯한 이말을 해명하기 위해서 많은 책들이 간행되고 이론이 분분해져 이말은 소설에 대한 금언 비슷한 말이 되어버렸다.
이러한 금언을 염두에 두고 김향숙소설집 『겨울의 빛』에 수록된 「그물 사이로」 연작을 읽어보면「부르좌의 서사시」는 커녕 「프롤레타리아의 담시」도 아니고 「노파의 신세 타령」같은 것으로 느껴진다.
「그물 사이로」연작은 모두 네편으로 이루어졌는데, 언양댁이라는 늙은 여인이 응어리진 감정을 풀지 못하고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다가 죽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그리고 있다. 조총련계로 넘어간 아들 때문에 남편과 별거하고 딸네집에 얹혀 살면서 사위의 눈치를 살피는 처량한 신세의 언양댁은 근대사 전개의 주도계급인 부르좌가 아니다. 그렇다면 한많은 여인의 이야기를 다룬 이 작품은 진정한 소설이 못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판단만큼 위험스러운것은 없다. 소설에 대한 일방통행식 정의를 바탕으로 작품을 평가하는 것 자체가 교조주의적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서양적 의미의 부르좌가 우리역사의 진정한 한 계급이 되어본 적이 별로 없다는 점을 상기한다면「부르좌의 서사시」운운하는 말은 큰 의미를 갖지 못한다.
김향숙의 소설은「부르좌의 서사시」와는 애초에 거리를 두고 출발한다. 「그물 사이로」 연작에서 보듯 늙은이들의 의식세계에 깊숙이 잠입하여 분단현실의 의식적 상처들을 살펴보고 그 상처들이 어떻게 커져가고 있으며 어떤식으로 아물고 있는가를 정확하게 제시한다.
역사를 창조한다고 떠들면서 자기와 타인을 동시에 기만하는 인물도 없고, 기존인식에 새로운 빛을 던져줄 것같은, 관념 덩어리도 존재하지 않는다. 평범하지만 끝까지 평범하지는 않은 언양댁같은 인물을 통해서 역사의 오점과 얼룩들을 성실하고 섬세하게 묘사한다.
하지만 이 작가의 가능성은 취약점도 될 수 있다. 취약점은 첫째, 가족적 연대감에 대한 집착이다. 안쓰럽고 절박한 가족적 연대감때문에 의식전개가 과거로만 치닫는다면 의고적 세계에 함몰될 수도 있다.
소설을 통해 미래에 대한 전망을 정립시키라는 무식한 부탁을 하자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현실을 보다 날카롭게 보여달라는 주문이다. 둘째, 이 작가의 장기인 치밀한 심리묘사는 충분히 새롭게 느껴지지만 사회학적 상상력에서 벗어나 근대주의자들의 심리적 병리현상으로 뒤바뀌게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다. 우리에게 고유한 법으로 알고 있는「홧병」이라는 것도 요즈음에는 정신병리학적 복합증후군으로 이해되고 있다. 개인의 「홧병」을 개인의 정신병리학적 증후군으로 이해한다기 보다 사회적 병리현상으로 진단하는 작가적 통찰력을 기대하는 것이다.
김향숙의 소설집『겨울의 빛』은 이러한 주문과 우려와 기대를 넉넉하게 감당할수 있는 많은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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