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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왕 주도로 좌우파「절묘한 타협」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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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수도 마드리드에서 서북쪽으로 54㎞떨어진 「발 데 로스카이도스」(전몰자의 계곡)라는 곳에 바위산을 뚫고 지은 지하성당이 있다. 그 입구를 2백60m쯤 들어가 촛불로 어둠을 밝힌 제단을 뒤로하면 십자가와 함께 「프란시스코·프랑코」라는 이름이 새겨진 화강암 무덤이 희뿌연빛으로 다가온다.
성당규모와 그 공법에 놀라 탄성을 연발하던 관광객들이 이 무덤앞에서 약속이나 한듯 침묵을 되찾는 순간 안내자의 설명이 정적을 깨뜨린다.
『스페인의 역사를 바꾼 프랑코」총통이 여러분의 발밑에 잠들어 있읍니다. 이 주변은 그를 위해 싸우다 숨져간 내란때의 무명용사들이 함께 묻힌 곳입니다…』
『독재자의 망령조차 빠져나오지 못하도록 이토록 깊은곳에 묻은 것인가』
누군가의 물음이 넋두리처럼 허공에 퍼진다.
대답은 없다.
마드리드 시내에서도 사람들은 「프랑코」에 대한 이야기를 되도록이면 피하려고 했다.
『그에게도 훌륭한 통치자로서의 일면은 있었다.』50년전부터 기자생활을 했다는 엘알카사르지의 「고메스·테이요」부사장(72)이 무겁게 말문을 열었다.
독재자로 낙인찍힌 「프랑코」이지만 공산당의 인민전선내각을 무너뜨려 좌익혁명을 막고 지역간의 인종대립이 끊이지 않는 스페인의 분열을 막은것도 그만이 해낼수 있었던 업적이라고 설명했다.
엘 알카사르지가 「프랑코」시절 그의 후광을 받았던 신문이라는 것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이 노익장 현역기자 주장이 어느정도 타당성이 있다는 것은 오늘의 스페인이 입증하고 있다.
「프랑코」는 자신이 죽기 6년전인 1969년부터 후계자로 지목한 부르봉왕가의 「환·카를로스」황태자에게 「대권인수」를 준비시켜 사후의 혼란을 미리 막는 예지를 보였다.
75년11월 「카를로스」국왕이 즉위하고 11년이 지나는 동안 이나라가 이룩한 민주주의의공로는 상당부분을 그에게 돌릴수 있을것 같다.
부진한 민주개혁에 박차를 가하기 위해 보수세력의 배척을 받던 「수아레스」국민운동 상을 수상으로 기용(76년7월)한 것이나 81년 의사당내에서의 각료및 의원전체를 인질로 한 일부 군장교의 쿠데타시도를 직접 나서서 봉쇄한 것등은 그가 스페인의 민주질서를 확립하는데 획기적인 기여를 한것으로 평가되고있다.
「프랑코」사후 군부의 동향은 스페인 민주화의 결정적 요소로 간주돼왔다. 특히 군부가 지난 40여년간 보수세력의 보루였다는데서 항상 민정의 불안요소로 간주돼왔다.
이러한 군부를 장악한 인물이 국왕이었다.
『우리국왕은 「프랑코」의 집념과 「드골」의 결단력, 「케네디」의 추진력을 겸비한 훌륭한 지도자다. 스페인에 오늘날처럼 생기가 넘쳐 흐르는것은 우리에게 그와 같은 젊은 국왕이 있기 때문이다. 수르바노가의 고급장교훈련소에서 만난 「마누엘·산티아고」육군중령은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우며 국왕자랑에 열을 올렸다.
과도기적 성격의 내각을 맡았던 「수아레스」전 수상 또한 정치신생국이나 다름없던 이나라에 대화를 통한 좌우파간의 협력과 평화적 정권교체등 그때까지 볼수 없었던 새로운 정치풍토를 조성하는등 뚜렷한 발자취를 남겼다.
수상취임 2년만에 「수아레스」는 정치개혁안에 대한 국민투표와 총선거를 거쳐 새헌법을 발효시켰고 경제난국을 타개하기위해 사회노동당·공산당등 좌파와도 타협, 광범한 경제개혁을 추구했다.
이 과정에서 시련이 없었던 것은 물론 아니다. 합법화된 공산당이 노조를 규합, 좌파의 입김이 거세지고 「스페인의 기적」이라고 불리던 60년대의 경제성장도 두차례의 오일쇼크를 겪으면서 주춤했다.
또 이혼·마약법·사학·세제개혁 법안을 둘러싸고 UCD에 내분이 일어나 당세는 급격히 약화됐다. 여기에 바스크족 분리주의자 (ETA) 들의 테러가 급증, 80년 한해에만 전국에서 l백20명이 숨지는등 사회가 불안해져 「수아레스」는 81년1월 사임했다.
그뒤를 「소텔로」 내각이 이었으나 82년10월 총선에서 양원 모두 약관 40세의 『곤살·레스』가 이끄는 사회노동당(PSOE) 에 참패, 스페인에 46년만에 다시 좌익정권이 들어섰다.
『사람들은 사회당이 집권한것에 대해 정책변화라는 측면에서는 별관심이 없었다. 내란이나 쿠데타에 의하지 않고 국민의 뜻에 따라 정권이 바뀔수 있다는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회당의 2기 집권이 실현된 최근에 와서는 상황이 달라졌다. 대NATO·EC정책이 선거의 주요쟁점으로 등장할 만큼 유권자들의 관심폭이 넓어지고 있다. 엘알카사르지의 「고메스」씨 설명처럼 스페인국민들의 정치적 관심은 지난4∼5년사이 「정권교체의 가능성」단계에서 「대외정책이 국민생활에 미치는 영향」의 단계로까지 급속히 발전했다. 그만큼 정차가 성숙되어가고 있는 증거다.
사회당의 「곤살레스」수상은 우파로부터 정권을 넘겨받았으나 국내외정책, 특히 대외 정책에서는 집권초기와는 달리 우파의 정책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느낌이다.
「곤살레스」는 당초 82년 선거에서 국민들 사이에 미군기지 철수요구등 반미 감정이 있는 점을 감안, 「소텔로」내각이 실현시킨 NATO가입에 반대, 탈퇴를 주장했으나 84년 유럽의 다른 사회민주주의 정당과 마찬가지로 당대회에서 이를 번복하여 잔류키로 결정, 지난3월 국민투표를 통해 이를 확정하는등 친서방 정책으로 돌아섰다.
「곤살레스」는 사회노동당 집권후 차츰 안정돼가는 경제와 EC가입에 따른 선진 유럽에의 부푼 기대로 국민들의 의식이 대립보다는 화합을 추구하는 쪽으로 변하고 있음을 파악, 이를 감행했던 것이다. 그는 국민투표결과가 지지쪽으로 판명되자 때를 놓치지 않고 지난 6월 조기총선을 실시, 2기집권을 실현하는등 집권기반을 굳혔다.
스페인은 이처럼 「프랑코」가 지명한 후계자「카를로스」국왕을 기수로하여 2마리의 용맹한 사자 「수아레스」와 「곤잘레스」가 이나라가 필요로 했던 정책들을 과감하게 추진함으로써 서구의 선진대열에 가까워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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