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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이만큼 자랐구나"가슴뿌듯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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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서울 아시아경기대회 개막식을 본 외국의 체육인이나 교수들, 또 언론인들이 이구동성으로 『환상적』이라느니 『전통문화의 멋진 조화』라느니 『웅장하고 조직적인 색상의 잔치』 라느니 찬사를 늘어놓고 있다. 분명 이방인들의 눈에는 그것은 하나의 경이로 비쳤을 것이고 모두가 한국인의 저력을 의심할수 없게 되었을 것이다.
한마디로 우리 국민이 이제는 이만큼 자랐구나 하는 가슴 뿌듯한 마음을 갖는 것이 어찌 나하나 뿐이랴.
집안에서 처음 아시아경기의 잔치를 맞은 나로서는 남다른 감회를 느낀다. 일장기를 달고 베를린 올림픽에 참가했던 나로서 우리의 국력이 이만큼 커진 것을, 특히 일본인들에 여보아란 듯이 자랑하고 싶다. 아울러 실향민의 한사람으로 북녘의 동포들이 왜 이 감동을 함께 나누지 못하는가하는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나의 가슴을 억누른다.
또 70년 제6회 아시아경기대회를 서울에 유치해놓고서도 경제적인 이유외에 메인스타디움에 일장기만이 휘날릴것을 고려한 경기수준 문제때문에 개최권을 반납해야만했던 기억이 되살아나 더욱 감개무량하기만하다. 당시 제5회대회 한국선수단장을 맡았던 나는 개최포기로 우리의 무능을 드러내고 국제적인 체면이 크게 손상되어, 말하자면 큰 빚을 진 기분이었다. 그러나 16년만에 그 빚을 갚고도 남을만큼 성공적인 대회를 열었으니 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
나는 정치도 모르고 학문도 모르고 오로지 스포츠 외길을 걸어온 사람이다. 일부 젊은이들이 주장하는 올림픽비판론이나 86·88 두 스포츠제전에 굳이 정치적인 의미를 부여하려는 일부 식자들의 견해에 불만을 갖고 있다. 스포츠는 순수한 것이며 겨레의 얼과 슬기를 모은 우리의 역량을 세계인들 앞에 보여준다는 것 또한 순수하고 보람있는 일이라 믿기 때문이다.
세계의 매스컴이 20일 개막식에 대해 찬사를 아끼지 않은것도 그러하려니와 빗속에도 얼굴 한번 찡그리지않고 열과 성을 다해 작품을 만들어내는 어린 학생들의 그 진지함도 이런 뜻을 담고 있는것이 아닐까.
아뭏든 우리에게 새로운 자부심과 보람을 안겨준 그 감동은 우리 사회속의 갈등과 불신까지도 용해시켜 줄만한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것이 바로 스포츠의 위대한 힘이기도 하다.
우리 국민의식이 높아진만큼 관중의 태도 또한 훌륭했다. 잠실스타디움을 메운 7만5천여관중가운데 대다수가 비를 맞았으나 개막식행사가 모두 끝날때까지 조금도 흐트러짐없이 질서를 유지했으며 어떠한 혼란이나 소동이 있었다는 소식도 나는 듣지 못했다.
이정도라면 우리도 올림픽국민으로서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으며 선진국대열에 오를 자격을 갖춘셈이다.
매스게임에 대해서는 전문가가 아닌 내가 무어라 평하기 어렵지만 나와 함께 개막식을 지켜본 일본기자가 감탄하는 것으로 보아선 그들에게 큰 소리를 칠만하게 됐다.
일본선수단은 「나카소네」수상이 보는 가운데 손에손에 태극기를 흔들면서 입장했다. 아마도 「후지오」 망언으로 인한 한국국민감정의 악화를 우려해 특히 신경을 썼던것 같다.
이에대해 관중들은 비록 박수에는 인색했지만 조금도 야유를 하지는 않았다. 우리의 도량을 나타낸 태도라고 말하고 싶다.
또 중공선수단에 대해선 이념을 달리하는 미 수교국임에도 가장 큰 박수를 보냈다. 평화의 의지를 보여준 것이다. 그것이 바로 스포츠라는 것을 정치인들은 알아야한다.
자유중국이 이 대회에 참가하지 못한것은 못내 섭섭하고 남의일 같지 않아서 마음이 아프다. 국제스포츠무대에서도 고립된 그들의 현실이 어쩔수 없다 하겠지만 IOC의 회원국을 OCA(아시아올림픽평의회)에서 제외한대서야 말이 안된다. 국가호칭은 어떻든 하루빨리 동참할 날이 오기를 기대한다.
북한의 불참은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한다. 먼저 지척지간에 있는 동포들이 이 제전을 함께 보지못하는것이 안타깝고, 다음으로 동족의 행사를 외면하면서 어떻게 올림픽을 공동주최하겠다는 것인지 상식으로는 이해할수가 없다.
나는 올림픽단일팀구성을위한 63년의 남북회담에도 참석했었고 서울올림픽개최를 결정한 바덴바덴 IOC총회때도 그곳에 가서 북한대표들을 만나보았었다. 이들을 대할때마다 『스포츠를 통해 마음의문을 열자』고 호소를 해보았지만 아무런 반응조차 없었다. 북한이 서울대회를 방해하려는 뜻이 분명한데 IOC는 무엇때문에 공동주최주장에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지 답답하기만하다.
지난달 베를린 올림픽 50주년기념행사에 참석했을때 「빌리·다우메」 서독올림픽위원회위원장은 나에게 그들이 보관하고 있던 그리스 투구를 전해주면서 『한국인들은 정말 무섭다. 올림픽을 개최할 충분한 자격이 있다. 우리사회에서도 한국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다』 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이보다 더 기분좋은 일은 귀로에 동경에 들려 일본인들이 우리를 부러워하고 훌륭한 올림픽시설, 철저한 대회준비에 감탄하는 것을 확인한것이다.
베를린올림픽에 나와함께 출전해 삼단뛰기에서 금메달을따낸 「다지마」(전도직부)씨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일본선수들은 이제 과거와같은 정신력을 잃어가고있다. 반대로 한국은 무서운 기세로 성장하고있다. 앞으론 일본이 업신여김을 당하게될지 모른다』
자만은 자칫 퇴보의 함정이 될수있고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는 법인만큼 남의 칭찬에 지나치게 으쓱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러나 자만이 아닌자신의 회복은 앞으로 국가적 난제를 풀어가는데 있어서도 우리국민에게 소중한 자산이 될 것이다. 이번대회가 바로 그같은 국민적자신감을 확인하고 다지는 마당이 되었으면 한다. <손기정 육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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