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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올림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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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서울의 아시아경기대회는 건국 이후 우리가 치르는 가장 큰 잔치이기도 하다. 지구 육지 면적의 3분의1을 차지하고 전세계 인구의 절반을 거느린 광활한 아시아대륙-.
인종과 언어와 종교는 물론 생활관습이나 수준마저 현격하게 다른 아시아제국의 젊은이들이 한마당에 모여 함께 뛰고 어우러진다.
그점에선 올림픽보다 더 다양한 개성과 색채를 지닌다.
1인당 국민소득 2만4천달러의 아랍에미리트, 1만8천달러의 사우디아라비아와 1백16달러의 방글라데시, 1백13달러의 부탄이 스스럼 없이 한자리에 모이는 잔치, 인구10억의 중공, 7억5천만명의 인도와 17만명의 맬다이브, 36만명의 바레인이 어깨를 나란히 참가하는 축제, 그리고 불교와 유교, 기독교와 마호메트교가 손을 맞잡고 「영원한 우정과 전진」을 재확인하는 자리가 바로 아시안 게임이다.
아시안 게임의 모태는 1913년 마닐라에서 열린 「동양올림픽대회」다. 그러나 이 대회는 38년 도쿄에서 제11회 대회를 열고 막을 내렸다. 34년에는 인도를 주축으로 한 「서아시아경기대회」 가 뉴델리에서 별도로 열렸지만 첫 대회가 마지막 대회였다. 모두 당시 세계를 감도는 심상찮은 전운 때문이었다.
동·서아시아를 한데 묶은 오늘과 같은 아시안 게임이 싹튼 것은 2차 대전 직후다. 오랜 식민통치에서 벗어난 인도의 고 「네루」 수상이 그 횃불을 들었다.
51년 뉴델리에서 첫 대회를 열었으나 한국에서는 6·25전쟁이 막바지에 있을 때였다.
그래서 한국은 54년 제2회 마닐라대회에 처음 출전, 종합3위를 차지해 아시아의 스포츠 강국으로 부상했다. 그 이후 9회때까지 모두 종합2위 두번, 3위 네번을 기록했다.
그러나 70년 제6회 대회를 서울에서 치르기로 했으나 경제형편상 대회를 반납한 쓰라린 경험이 있다. 그때의 「빚」 을 갚기 위해 이번 서울대회를 더욱 화려하고 거창하게 꾸몄는지도 모른다.
아시안 게임을 통해 우리의 기억에 남는 명승부도 많았다. 그 대표적인 것이 78년 12월30일 방콕에서 열린 제8대회 때의 축구 결승전.
해방 후 남북한이 처음 맞부닥친 이 한판의 승부는 한반도 전체를 긴장과 흥분의 열기로 몰아넣었다.
그러나 결과는 0-0 무승부로 끝났지만 경기 후 22명의 남북한 선수들이 뒤섞여 기념 촬영하는 것을 지켜본 관중들은 이것이야말로 「진짜 금메달」 감이라고 했었다.
그 북한이 이번 서울대회에서는 자취를 볼 수 없다. 그뿐 아니라 대회방해 공작까지 획책하고 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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