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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명량’이 전하는 ‘아드폰테스(ad fontes)정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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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관에서 우리는 ‘행복한 감금(imprisonment)’을 경험한다. 어두컴컴한 현대인의 동굴에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은 딱 의자 너비 만큼이다. 오로지 시각만이 자우로운 감각기관이 된다. 스크린 속에서 새로운 볼거리를 찾는 현대인들은 스마트폰과 PC화면이라는 일상의 스크린을 벗어나 영화관에 간다. 대형 스크린에서 느낄 수 있는 스펙타클을 경험한다. 영화는 우리가 문화를 가장 편하게 느끼게 하는 인터페이스이다.

역대 가장 많은 사람에게 행복한 감금을 선사한 영화는 ‘명량’이다. 영화 명량을 두 번 봤다. 처음 봤을 때는 '영화'라는 매체 특징을 잘 살렸다고 생각했다. 시각이미지의 핵심은 '재현(representation)'이다. '영화(movie)'는 다양한 카메라의 프레이밍을 통해 '재현'을 가장 효과적으로 할 수 있는 매체다. 명량해전의 장면을 생생하게 재현함으로써, '절망적 순간에도 '이순신' 같은 리더가 있다면 승리할 수 있다.'는 내러티브를 전달했다. 영화이론 책에 나오는 표현으로 '실천적 추론'이 잘 됐다.

두 번째 봤을 때는 이순신이라는 인물이 주는 '근원적 메시지'에 감동됐다. 그에게는 세기를 뛰어넘어 가슴을 울리는 그 무언가가 있었다. 그것은 '아드폰테스(ad fontes)'였다. "원천으로"라는 뜻이 이 라틴어는 인문학의 핵심 키워드다. 이순신에게서는 '리더의 아드폰테스' 정신이 있었다. "백성을 향한 충". 충의 정신으로 어떠한 위기 속에서도 '지켜야 할 것을 지키는 것'이다. 여기에서 울돌목 전략도 나왔다.

이 영화는 '아들과 아버지의 대화'를 모티프로 주제를 전개시킨다. 유교문화에 비추어 볼 때(inter-textuality), 아버지는 '충', 아들은 '효'를 상징한다. 대사를 보면 그렇다. 해전에 나가는 아버지에게 절하는 아들과 바다를 향하는 아비의 시선교차는 이러한 대비를 결정적으로 드러내는 신(scene)이다. 이러한 영화적 장치는 이순신의 아드폰테스, 충에 주목하게 한다.

사실, 우리 정치문화는 효가 충보다 중요했다. 충을 강조한 건 일본이었다. 조선의 효 문화는 가족, 친척, 이웃과 같은 사적 공동체를 중시하는 문화로 발전됐다. 서울대 이정복 정치학과 교수를 비롯해 다수의 학자들은 우리 정치의 '연고주의', '지역주의'의 뿌리를 효문화에서 찾는다. 이순신은 효자였다. 그러나, 위기 앞에서 리더의 아드폰테스는 '충'에 더 집중하는 것이었다.

영화에서 인상적인 장면을 하나 더 꼽자면, 백성이 작은 배를 노 저어와 장군선을 세우는 데 돕는 것이다. 이것은 리더십의 완성이 팔로어십을 통해 이뤄진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리더'의 아드폰테스가 '백성을 향한 충'이라면 팔로어의 아드폰테스는 ' 리더를 위한 충 '이지 않을까 싶다. 1700만이 명량을 봤다. 리더십뿐 아니라, 팔로어십에 대해서도 생각하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

글=김유빈 기자 kim.yoov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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