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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다이어트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499호 29면

이따금 아내가 보채어 저울에 올라서서 몸무게를 잴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내 몸무게는 젊을 때나 지금이나 거의 변함이 없습니다. “그렇게 잘 먹이려 애써도 도무지 살이 안 찌니 참!”


아내는 날씬한 몸무게가 좀 늘어나 남들에게 후덕하게 보이기를 원하는 모양입니다. 아내가 그렇게 말하면 저는 딴청을 하죠. “내 또래들은 어떻게 하면 뱃살을 좀 뺄까 걱정들인데 나야 뱃살 때문에 걱정할 일이 없으니 다행이지 뭐!”


사실이 그렇습니다. 다만 바람이 있다면, 제 에고(ego)의 몸무게나 줄어들어 좀 더 날씬해지는 것입니다. 어쩌다 아내와 말다툼을 하다 보면, 웬 고집이 그렇게 세냐고 퉁아리를 듣기 일쑤니까요. 지금보다 더 늙어 ‘고집 센 늙은이’란 말은 듣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도 있고요.


인도의 성자로 불리는 라마크리슈나는 말년에 이런 멋진 고백을 했더군요. “나에게는 이제 에고라고 할 만한 게 없다. 만일 내게 에고라고 부를만한 게 남아 있다면, 나뭇잎이 똑 떨어진 뒤에 나뭇가지에 남은 희미한 자국 같은 에고가 있을 뿐이다.”


헉! 비유도 멋지지만, 살아 있는 존재 속에 에고라고 할 만한 게 없다니! 라마크리슈나는 이런 비유를 들려주면서 자기에게 남아 있는 에고를 ‘깨달음의 에고’, 혹은 ‘사랑의 에고’라고 불렀습니다. 폭풍 같은 인생을 뚫고 나아가는 데는 사랑보다 아름다운 것이 없다는데, 그래서 라마크리슈나는 ‘사랑의 에고’를 남겨두었던 것일까요.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삶의 방식이 점점 더 강화되는 듯싶은 이 야만의 시대에 라마크리슈나 같은 이의 삶은 어쩜 외계인의 그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깨달음과 사랑의 에고는 커녕 ‘욕망의 에고’만 살아 있는 이들이 득세하는 세상이니까 말입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더하기 곱하기 빼기 나누기를 다 배웠건만, 욕망의 에고에만 붙잡혀 사는 이들은 더하기 곱하기라는 셈밖에 모르니까요. 자기 소유를 비우거나 자기 소유를 이웃과 나누려는 선한 에고는 상실된 상태지요.


저는 모든 사람 속에 신성(神性)이 살아 있다고 믿습니다. 그것을 ‘불성’이라 하든 ‘아트만’이라 하든 종교마다 그 표현이 다르지만 말입니다. 요컨대 거룩한 신의 성품을 지닌 사람은 남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여기고 그 아픔에 동참하는 사람이지요. 우리는 흔히 내 아픔만 해도 벅찬데, 어찌 남의 아픔까지 떠맡을 수 있느냐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 속엔 그런 능력이 주어져 있습니다. 남의 아픔을 품어 안으면 내 아픔도 기적처럼 치유됩니다.


저는 라마크리슈나 같은 아름다운 고백을 하기엔 모자라도 한참 모자라는 인간이지만, 아내의 보챔이 없더라도 사랑의 저울엔 자주 올라가 몸무게를 재봐야겠네요. 고집·집착·갈망·탐욕 같은 에고의 몸무게가 줄었는지 아니면 더 늘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그래서 내 가까이 있는 곁님들에게 행복을 선물하기 위해 ‘사랑의 에고’만 남기까지 마음의 다이어트를 날마다 하려고요.


고진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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