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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정부 초청 ‘셰브닝 장학생’ 한국 교수 못 갈 수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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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국민권익위원회에 들어온 김영란법 유권해석 의뢰가 시행 첫날 5100건에서 하루 만에 240건이 늘어 5300건을 넘어섰다. 하지만 권익위가 이틀간 문의에 답변한 것은 단 1건뿐이었다. 기업체나 행정기관에서 올라온 까다로운 서면 질의에 대해선 기관 협의와 법적 검토가 필요해 하루 이틀 사이에 결론 내리기 쉽지 않다고 권익위 관계자는 토로했다. 김영란법이 시행된 뒤에도 권익위의 유권해석이 나오지 않다 보니 혼란을 호소하는 기관이 늘고 있다.

◆ 각국 정부가 초청한 유학 가도 되나

“아직 유권해석을 받지 못해 기다리고 있습니다.”

권익위 “대가 적정성 따져봐야”
해외 연수 등 유권해석 없어 혼란
국회선 3만원 맛집 리스트 돌고
란파라치 피해 신촌·마포 가기도

주한 영국대사관 관계자는 29일 “영국 정부의 한국 학생 장학금 지원 프로그램이 김영란법에 저촉되는지 여부를 권익위에 문의해 놨는데 답변을 받지 못했다”며 “프로그램 지원자들의 문의가 많아 마음이 무겁다”고 말했다.

주한 영국대사관은 지난 8월부터 영국 외무부의 지원을 받아 영국 내 대학에서 석사 학위를 공부할 수 있는 ‘셰브닝(chevening)’ 장학생을 모집하고 있다. 오는 11월 8일까지 접수받아 20명을 선발한다. 이 과정은 영국 정부가 전 세계적으로 지원하는 장학금 프로그램이다. 연간 4000만원 이내의 학비와 생활비를 지원해 특히 공무원이나 대학 관계자들에게 인기가 많다.

하지만 권익위는 민간기업들이 제공하는 해외 연수나 외국 기관이라 하더라도 한국인들에 제공되는 홍보성 출장 등은 김영란법상 허용되지 않는다고 유권해석을 해왔다. 셰브닝 장학금도 영국 외교부가 지원 주체지만 기준상 허용 여부나 대가의 적정성 등을 따져서 가능 여부를 판단해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학 교수 등 연수를 희망하는 사람들은 발을 구르고 있다

권익위 관계자는 “주한 공관에서 같은 문의가 많아 법 적용 여부를 검토 중에 있다”고만 말했다.

◆달라지는 여의도 국회 주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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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일 서울 송파구청 전 직원의 이름이 들어간 김영란법 준수 서약서가 청사 로비에 걸려 있다. [사진 김경록 기자]

한편으로 김영란법 시행은 여의도 국회 주변의 풍속도도 바꿔놓고 있다. 야당 의원실은 여의도와 종로, 용산 등 인근 지역의 음식점들로 ‘3만원 이하 맛집 리스트’를 만들어 돌려 보고 있다.

김영란법 위반 사례를 감시하는 ‘란파라치’를 피해 여의도를 탈출하려는 움직임도 생겼다. 한 새누리당 국회의원 보좌관은 “여의도보다는 강 건너 마포에서 약속을 많이 잡기 시작했다”며 “여의도에선 누가 지켜보고 있지 않나 신경이 쓰인다”고 말했다. 더불어민주당에선 보좌진 사이에 “홍익대, 신촌으로 약속 장소를 옮겨야 한다”는 말이 나온다.

하지만 대부분은 김영란법을 환영하는 분위기다. 여권의 또 다른 보좌관은 “우리에겐 28일(김영란법 시행일)이 ‘민원 해방의 날’”이라고 말했다. 그는 “그동안 ‘산재 등급을 올려달라’ ‘아들 군대 보직을 변경해 달라’는 등 지역구에서 말도 안 되는 민원들이 제기돼 왔다”며 “들어줄 수도 없지만 냉정하게 거절했다간 지역에서 의원 욕을 하고 다녀 참 난감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젠 김영란법을 이유로 대며 들어주지 않을 법적 명분이 생겼다”고 덧붙였다.

◆군인, 에버랜드 무료 이용 제한했다 철회

김영란법 해프닝도 일어났다. 에버랜드는 28일 김영란법 시행에 따라 휴가 군인 등에 대한 무료 이용 혜택을 잠정 중단한다고 밝혔다가 네티즌 등의 비판이 잇따르자 하루 만에 철회했다.

에버랜드는 28일 휴가 나온 군인과 의경, 사회복무요원의 무료 이용 혜택을 잠정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29일 오후 블로그를 통해 “김영란법의 적용 대상을 명확히 하기 위해 권익위에 질의한 상태”라며 “의무 복무 중인 일반 사병, 의경, 사회복무요원은 권익위 회신 전에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다만 장교, 부사관, 군무원 등에 대해선 권익위 회신에 따라 무료 이용 혜택 여부를 결정할 계획이다. 에버랜드 관계자는 “의무 복무의 경우 김영란법 대상에 포함될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판단돼 내린 조치”라고 설명했다.

◆배우자들도 비상

김영란법 시행으로 적용 대상인 공직자·교직원·언론인의 배우자들도 고민에 빠졌다. 김영란법에 따르면 공직자(교원·언론인 포함)의 배우자가 금품을 수수하는 경우 해당 공직자가 처벌을 받는다.

회사원 이모(여)씨는 28일 회사 회의에서 남편이 김영란법 적용 대상자라 임직원들에게 보내는 명절 선물을 보낼 수 없게 됐다는 얘기를 듣고 놀랐다. 부서 회식을 할 경우 1인당 3만원이 넘으면 이씨는 초과 부분을 개인적으로 결제해야 한다는 설명도 들었다. 이씨는 “아직 공식 통보를 받은 건 아니지만 정말 그렇게 된다면 역차별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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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서울의 한 사립대 교직원인 성모(35)씨는 28일 아이를 출산했다. 그는 “남편이 김영란법 적용 대상자라서 지인들이 보내는 출산 기념 선물을 받았다가 남편에게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는 걱정이 든다”고 말했다. 성씨의 남편 홍모(35)씨 역시 “직업이 뭔지에 따라 인간관계의 형태가 달라져야 하는 세상이 됐다. 김영란법은 ‘매정법’”이라고 말했다.

글=박성훈·김백기·채승기 기자 che@joongang.co.kr
사진=김경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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