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라이」같이 살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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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지난 겨울 뉴욕에서 일본영화 한편을 보았다. 유명한 「구로자와·아키라」가 감독한『난』 이라는 작품이었다. 미국인 관객들은 「구로자와」이름만 나와도 박수를 치는 등 그 반응이 대단했다. 봉건시대를 배경으로 한 소위 사무라이 전쟁영화였는데 전편이 피로 얼룩졌다. 주인을 위해서는 목숨을 초개같이 버리는 사무라이 정신이 곧 일본정신이라는 명분을 걸고 내심으론 무분별한 폭력과 잔혹함을 팔아보고자한 감독의 속임수가 훤히 들여다 보이는 것 같았다.
「하루를 살더라도 사무라이처럼 살겠다.」
서울 영동 룸살롱 살인사건의 범인중 한사람이 밝힌 소망이다. 끔찍한 범행뒤에 극적인 도주와 잠적을 거쳐 마침내 베테랑 형사들이 격투끝에 간신히 붙잡아 압송하던 차안에서 한 말이므로 그 한마디엔 사못 비장감이 넘쳐 흐르고있다. 과연 복수의 칼을 가는 사무라이 같기도 하고 마지막 길을 떠나는 가미가제 특공대 같기도 하나. 자신이 비록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해도 사무라이처럼 살다 죽어? 어째서 하필이면 「사무라이」인가.
이번 사건은 매일 새로운 충격을 우리에게 주었다.
첫째로 이 사건에서 받은 충격은 한꺼번에 네명이나 칼과 둔기로 살해하고 그 시체를 병원까지 운반, 함부로 팽개치고 간 그들의 잔혹함과 방약무인함일 것이고, 두번째의 충격은 위장자수까지 할 정도인 그들의 위계질서이고, 세번째는 한결같이 전혀 반성이나 부끄러움을 보여주지않는 인간성 마비이며, 네번재 우리를 경악하게 한 것은 그들이 보여주는 무분별한 「사무라이」지향이다. 이건 정말 우리를 절망시킨다.
사무라이가 되고 싶은 그들은 누구인가.
말할 것도 없이 그들은 이제 20대의 푸르른 시간대를 살고 있는, 일본이 아닌 이땅의 젊은이들이다. 대학을 나왔거나 대학에 재학중인 자들이다. 그들은 끼니를 굶을 정도로 가난하지도 않았다. 일할 수 없을만큼 신체가 약하지도 않았다.
과연 그들은 누구인가. 무엇의 돌연변이인가..
묻고 물어도 확실하게 얻어지는 결론의 하나는 그들이 어쨌든 「이 땅의 젊은이」라는 사실이다.
그들이 돌연변이라고 하더라도 원형질은 그러하다. 그렇다면 그들이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인간성의 마비현상과 사무라이 정신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사무라이처럼 다 죽겠다고 외치는 일본지향의 현상은 그들을 둘러싼 우리사회의 고질적 병리현상과 무관하다곤 할 수 없을 것이다.
극일하자면서 코흘리개 조무래기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자진해 바친 성금으로 짓던 독립기념관이 무리한 공사, 어처구니 없는 관리로 불타버린 일은 불과 얼마 전이다. 그곳의 어떤 건물 구조물은 일제로 되어 있다는 것도 이미 알려진 사실이고 각계각층의 지도층 인사들을 포함한 많은 기성세대들은 바로 어젯밤에도 「가라오케」에 장단 맞춰 왜색노래를 흥겹게 불렀다는 것도 명약관화한 사실이다.
우리는 이번 사건을 놓고 무슨 외국영화 들여다 보듯이 「아」하고 입이나 벌리고 있을 일이 아니다. 생선회칼 어쩌고 하면서 킬킬거릴 일이 아니다. 앞으로 룸살롱에 가도 웨이터에게 호통치지 않겠다든가, 영업부장이 받으러오면 밀린 외상값 쟁빚을 내서라도 갚아야지 한다든가 하는 처방만 생각하고 있을 일이 아니다. 팽배해 있는 흑백논리, 그것으로 하여 여과되지 못하고 작은 일에도 단숨에 극단적으로 대결양상되곤 하는 우리사회의 감정적 인간거래· 한탕주의·힘의우월주의·일본에의 신예속주의. 그 모든 것들이 이번사건의 배면에 묻어있음을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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