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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삶의 향기

현장에 가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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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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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용
작곡가·서울시오페라단 단장

TV로 야구 중계를 보면 이따금 걱정이 된다. “거리가 저렇게 가까운데 타자가 때린 공에 투수가 맞으면 어떡하나.” 야구장에 한번 가보면 이런 걱정은 저절로 사라진다. TV에서 보던 것과는 달리 투수와 타자 사이의 거리는 충분히 멀다. 그리고 야구장의 잔디밭은 한눈에 들어오지 않을 만큼 넓다. 그 가운데 서 있는 외야수들의 존재가 너무 작게 보여 조금 과장하면 ‘콩알만 하다’. 그 조그만 존재들이 이리저리 날아오는 타구를 척척 잡아내는 것이 신기할 정도다.

TV가 담아내지 못하는 것은 그 외에도 많다. 타자가 공을 때리는 순간 온 야구장에서 한꺼번에 터져 나오는 함성의 볼륨감, 이곳저곳에서 벌어지는 나름의 야구해설과 토론, 한창 응원 열기가 올랐을 때 함께 부르는 노래의 흥겨움 등. 그 맛 때문에 굳이 사람들은 야구장을 찾는 것이리라.

녹음 기술이 생기기 전 음악을 들을 수 있는 방법은 스스로 연주하든가 아니면 다른 사람의 연주를 듣는 길 외에 없었다. 모차르트의 아버지는 어린 아들을 데리고 독일·프랑스·이탈리아 등 많은 곳을 여행했는데 신동 아들을 소개하려는 목적도 있었지만 각 도시에 흩어져 있는 좋은 음악들을 아들에게 들려주어 습득하게 하려는 교육적 의도 또한 컸다.

지금부터 50여 년밖에 안 되지만 나의 어린 시절 전축(요즘 말로 오디오 시스템)은 너무 비싸 내가 가진 음향기기란 작은 라디오밖에 없었다. FM 음악방송은 물론 없었고 기독교방송국이 하루에 30분 보내주는 ‘명곡을 찾아서’가 나의 주된 음악 감상 통로였다. 그러니 듣고 싶은 음악이 연주되는 연주회장을 찾아갈 때는 마음이 설레곤 했다. 어떤 음악회는 지금도 그 소리가 생생하게 기억될 정도로 집중해서 들었다. 그 이후 LP 음반, 카세트 테이프, CD를 거치면서 음악은 대중적으로 구입할 수 있는 상품이 되었고 디지털 시대가 되면서 음악을 녹음하고 보내고 받고 듣는 일이 요즘처럼 쉬워졌다. 이제는 음악을 듣기 위해 현장에 가지 않는다. 사람들은 인터넷과 방송에서 무한히 흐르고 있는 음악들을 애써 인식하지도 않는다. 그저 귀에 흘린다.

음악의 현장에 가야 느끼는 감동이 있다. 아무리 좋은 녹음도 결국은 TV의 야구 중계와 같다. TV 영상이 야구장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스펙터클과 볼륨감을 다 담아낼 수 없듯이 CD나 DVD 같은 녹음된 음악이 그렇다. 예컨대 80명의 오케스트라가 무대 위에 올라가면 그 섬세한 위치의 다름에 의해 펼쳐지는 음악의 그림이 시시각각 변한다. 눈을 감고 들어도 그렇다. “콘트라베이스는 오른쪽에서 다가오고 플루트와 오보에는 한가운데에서 뚜렷이 존재감을 드러낸다. 눈앞 가득히 현악기들이 음향의 강물을 펼치는데 금관악기들이 저 뒤에서 강렬한 광채를 낸다. 그리고 심벌즈가 저 뒤에서 폭죽처럼 높이 올라 터진다.”

때로 이런 음악의 파노라마를 옆의 청중도 숨 죽인 채 듣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한 악장이 끝나면 그도 조용히 숨을 가눈다. 때로 눈물을 훔치기도 한다. 이런 반응이 전달되었는지 연주자의 음악이 더 절절해진다. 그런 순간이 있다. 무대의 음악이 객석으로 전달될 뿐만 아니라 객석의 호흡이 무대에 전달돼 연주자가 그 힘으로 연주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 연주자와 청중이 같이 음악을 만드는 순간이다.

이런 의미에서 음악회의 현장을 찾는 행위는 정치집회나 종교집회에 참여하는 행위와도 닮았다. 참여함으로써 관심과 뜻을 표명하는 것이다. 이들 집회는 온라인에서 진행되기도 하지만 결국에는 체육관이나 교회당, 즉 현장에서 이뤄진다. 모이는 이들은 함께 말하러 왔지 들으러 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유능한 부흥사나 정치인은 적절히 청중으로 하여금 “할렐루야, 아멘” 혹은 “옳소!”를 외칠 수 있게 유도한다. 말하고 싶어하는 청중의 욕구를 풀어주면서 동시에 자신의 뜻도 전달하는 것이다. 하긴 고금동서의 음악과 종교와 정치는 거슬러 올라가면 대동놀이 혹은 제전에서 만난다.

문화의 계절, 한창 다양한 공연들이 펼쳐진다. 예술을 사랑하는 이들이라면 이 계절 한번쯤 음향기기를 놓아두고 현장을 찾았으면 좋겠다. 요즘 공연계가 어렵다고 한다.

이 건 용
작곡가·서울시오페라단 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