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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타적인 성은 곧 감옥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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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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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인한
연세대 교수·사회복지학

일본의 지인으로부터 들었던 이야기다. 일본 최고의 명문으로 꼽히는 모 대학 박사들이 모인 파티. 처음에는 화기애애하게 시작되나 최고의 자부심을 가진 이들이 그 자부심을 타인과 나누기는 어려웠나 보다. 곧 누군가 같은 대학 학부 시절의 추억을 감회에 젖어 이야기하기 시작하니, 타 대학 학부 출신들은 어색함에 하나둘씩 사라지기 시작한다. 다시 누군가 명문 중·고등학교 시절 사춘기의 추억을 꺼내며 중·고등학교 교육의 중요성을 주장하니, 평범한 일반 학교 출신들은 다시 불편함에 자리를 피한다. 어린 시절까지 더 거슬러 올라가며 줄어들던 사람들이 결국 세 명으로 좁혀졌다. 인간의 편가르기가 어디 거기에서 끝나랴. 그중 한 명이 “아버님 편안하시지?”라며 가족 간 인맥이라는 마지막 한 수를 던지는 순간, 결국 또 한 명이 사라지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자신들만의 성(城) 쌓기의 전형적인 예라 할까.

다소 극적인 과장은 있겠지만 인간 사회의 단면을 정확히 반영한 날카로운 이야기임은 분명하다. 게다가 일본 못지않게 학벌이 중시되는 우리 사회에서 여러 가지 비슷한 형태로 자주 나타나는 일이기도 하다. 비단 학계뿐만 아니라 다른 어떤 업종과 사회에 대입해도 형태만 다소 다를 뿐 본질적으로 이와 유사한 성 쌓기의 모습을 흔히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 조금만 뒤집어 보면 허무하기만 하다. 주위에 아무도 없는데 자신만 남는 것이 무슨 의미란 말인가.

사람에게는 성을 쌓고 싶은 욕망이 있다. 성 안에 머무르며 성 밖의 사람들과 구별되고 싶어 하고, 성 밖의 ‘다름’으로부터 안전하게 보호받고 싶어 한다. 그 성은 대개 ‘과거의 벽돌’로 쌓여 있다. 과거의 성취 자체는 귀중한 것이지만 그것에만 머물러 한없이 이득을 취하려는 순간 병리적으로 왜곡되기 시작한다. 예를 들면 학벌이라는 성. 10대 후반 치렀던 시험 결과에 수십 년간 의존한다는 것은 삶이 10대 후반에 고착돼 있다는 것이 아닌가. 더 거슬러 올라간다면 요즘 회자되는 ‘금수저’ 역시 스스로의 성장보다는 태어난 순간의 혜택에 고착돼 있음을 말하지 않는가. 하나의 순간이 평생을 규정한다는 것은 얼마나 비합리적인 고착 사회의 모습인가.

프로이트가 설명한 ‘고착(fixation)’은 미성숙한 수준의 방어기제 중 하나다. 발달 단계의 어느 한 부분에서 멈춰 버리고 더 이상 성장하지 않는 상태. 고착의 밑바닥에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깔려 있다. 성숙한 성인으로서 마주해야 할 세상이 두려워 성장을 거부하고 그 상태에 머무름으로써 자신을 방어하고자 하는 무의식적 메커니즘이다.

우리 사회에서 과거의 성취에 안주하고 자신들만의 인맥으로 배타적인 성을 쌓는 현상을 ‘사회적 고착’이라 진단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다음 단계의 사회적 성숙으로 나아가기를 두려워하며 과거에 머물러 있는 견고한 배타성을 보면 더욱 그러하다. 스스로는 그 성이 근사하게 보일 것이라 착각하곤 하지만 대개 그저 ‘벽’과 같은 것이다. 아니, 타인으로부터 스스로를 가둔다면 벽 이상의 감옥이다. 대한민국처럼 급변하는 역동적인 사회가 오래전 과거의 성취 혹은 태생적으로 부여받은 것에 고착돼 있다는 것은 모순이다. 빠른 변화와 고착이 공존하는 모순의 세상에서 각자의 성 안에 완고하게 머물러 있음으로써 관계는 점차 단절돼 가고 있다.

관계의 인간, 호모 커넥티쿠스는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성장한다. 관계를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것은 인간의 중요한 능력이나 때로 그러한 관계 능력이 폐쇄적이고 미성숙하게 변질되는 순간 배타적인 성을 쌓곤 한다. 성은 눈과 귀를 닫고 소통할 수 있는 입을 막는다. 소통이 단절되며 이해와 공감은 사라진다. 그리고 인간의 성장은 멈추어 버린다. 안전하게 머물기 위해 쌓았던 성은 오히려 우리를 가두어 관계라는 인간의 중요한 가치를 잃게 만든다.

성벽을 넘어 성 밖으로 나가 자신과 다른 타인과 만나는 것이 관계와 성장의 시작이다. 성 안에 갇힌 이는 결코 타인과 더 넓은 세상을 이해하지 못한다. 성은 아무리 아름다워 보일지언정 그 안에만 갇혀 있다면 감옥과 다를 바 없다. 사람들과 격리돼 있다면 그것이 바로 감옥이다.

송 인 한
연세대 교수·사회복지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