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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서 산 90만원 가방 선물, 국내서 120만원이면 처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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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란법 시행을 앞둔 12일 서울 서초구 한 일식집은 메뉴판에 ‘김영란 정식’을 포함시켰다. [뉴시스]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김영란법)’의 시행이 여드레 앞으로 다가왔다. 적용 대상자는 공직자와 사립학교 교원, 언론인 등이다. 이 밖에 이들의 배우자와 부정청탁을 하거나 수수 금지 금품 등을 제공한 일반인도 포함된다. 이 때문에 정부는 실제 이 법의 적용을 받는 대상자가 400만 명에 달할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하지만 일각에선 이 법으로 인해 영향을 받게 될 식당업주, 농수산업 종사자, 문화예술 관계자 등을 포함하면 사실상 대부분의 국민이 김영란법의 영향을 받게 될 것이란 말도 나온다.

[김영란법 D-8] 이러면 위법

일반 국민이 김영란법에 대해 알고 있는 내용은 직무와 관련된 경우 3만원을 초과하는 식사, 5만원이 넘는 선물, 10만원을 초과하는 경조사비를 받으면 처벌한다는 이른바 ‘3·5·10’ 기준 정도가 보통이다. 하지만 이외에 일반인들이 자칫 모르고 넘어갔다가 처벌받게 될 사안도 적지 않다. 국민권익위원회에선 인허가·인사·행정처분·형벌 등 처벌 대상이 되는 부정청탁을 14가지 유형으로 규정하고 있다. 실생활에 비춰 어떤 행위가 김영란법에 어긋나는지 국민권익위의 해설집을 토대로 정리해 봤다.

100만원과 ‘3·5·7’, 허용의 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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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일 오전 서울 한국프레스센터 국제회의장에서 열린 김영란법 강연회에서 참석자들이 국민권익위원회 곽형석 부패방지국장의 설명을 듣고 있다. [뉴시스]

① 한 지방자치단체에서 사회복지업무를 담당하던 공무원 A씨가 교통 관련 부서로 인사 발령을 받았다. 송별회 자리에서 잘 알고 지내던 지역 사회단체 관계자 B씨가 “그동안 수고 많으셨다. 얼마 전 여행 갔다가 사 왔다”며 가방을 선물로 줬다. 해외에서 90만원에 구입한 그 가방은 국내에선 120만원에 팔리고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 사이에 업무 관계성이 없기 때문에 B씨는 문제가 없다고 보고 가방을 받았다. 그러나 김영란법에 따르면 공직자는 직무와 상관없이 1회 100만원, 1년에 300만원을 초과하는 금품을 받으면 3년 이하의 징역과 3000만원 이하의 벌금형을 받는다. 따라서 향후 A씨와 B씨가 서로 직무상 영향을 주고받을 일이 없다고 해도 두 사람은 모두 3년 이하 징역 또는 3000만원 이하 벌금의 형사처벌 대상이 된다. 하지만 가방 가격이 국내에서도 100만원을 넘지 않았다면 처벌을 면할 수 있다. 1회 100만원 이하의 금품일 경우엔 직무와 관련 있을 경우만 처벌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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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지방의 한 반도체업체 사장 A씨는 관할 시청 청소과 공무원 2명과 함께 고급 일식당에서 저녁식사(60만원)를 한 뒤 술집에서 양주 3병 등을 마시며 260만원을 계산했다. 자리는 노래방(10만원)까지 이어졌다. 김영란법에선 비록 세 차례에 걸친 식사 및 술자리라고 해도 단기간에 이어진 경우는 1회로 적용한다. 이날 A씨가 쓴 총비용은 330만원이다. 1인당 110만원의 비용을 쓴 셈이다. 따라서 공무원들이 더치페이를 하지 않은 이상 ‘1회 100만원 초과’라는 기준에 적용돼 해당 사장과 공무원은 3000만원 이하의 벌금 또는 3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게 될 수 있다. 서용구 숙명여대 경영학과 교수는 “직무 연관성이 있을 때는 3만원만 넘어도 처벌받게 된다”며 “3만원이 넘는 식사는 무조건 더치페이를 하는 게 가장 안전하다”고 말했다.

③ 고등학교 교사 A씨는 스승의 날 담임을 맡고 있는 학생의 학부모 B씨로부터 2만원짜리 카카오톡 음료쿠폰을 받았다. A씨는 ‘5만원을 넘지 않았으니 문제가 없다’는 판단에 따라 그냥 쿠폰을 받았다. 하지만 김영란법에선 교사가 해당 학생에 대한 지도 및 평가를 담당하기 때문에 5만원 이하의 선물을 제공했더라도 위반 대상에 포함될 수 있다. 허용되는 경우는 ‘직무 수행을 위해 부득이하게 제공되는 3만원 이내 간소한 음식물이나 교통·통신’ 등이다. 국민권익위에서는 A씨의 음료쿠폰 사례에 대해선 “직무 수행을 위해 부득이하게 제공된 물품으로 볼 수 없다”고 명시했다.

공익이 아니면 사소한 청탁도 위험
④ 군 입대를 앞둔 A씨는 요즘 인기가 높은 의무경찰에 지원했다. 지방 경찰청 인근에서 식당을 하는 A씨의 삼촌은 조카에겐 말하지 않고 해당 경찰청 간부인 B총경을 만나 “의무경찰에 합격시켜 달라”고 부탁했다. 이에 B총경은 의경시험을 담당하던 C경정에게 “A씨가 체력 테스트에서 문제가 발생해도 눈감아 달라”고 부탁했다.

이런 경우 A씨의 삼촌은 조카를 위해 부정청탁을 했기 때문에 2000만원 이하의 과태료 부과 대상이 된다. 이를 수락한 B총경에겐 더 무거운 3000만원 이하의 과태료가 부과된다. 반면 청탁 대상이었던 A씨는 어떤 처벌도 받지 않는다. 김영란법은 본인이 청탁 대상이더라도 이를 모르고 있었다면 처벌 대상에서 제외하기 때문이다. 부정시험 청탁을 했던 A씨의 삼촌보다 B총경이 더 무거운 처벌을 받는 이유는 공무원에게 가중처벌을 적용하기 때문이다.

⑤ 외국인 노동자 A는 한 국립대 병원의 유명 의사에게 검진을 받으려고 접수를 문의했다가 “대기자가 많아 며칠을 대기해야 한다”는 답변을 들었다. 이에 A는 사회단체기관 직원 B씨를 찾아가 “날짜를 조정해 줄 수 없겠느냐”고 하소연했다. 이를 딱하게 여긴 B씨는 평소 알고 지내던 병원 관계자에게 부탁해 진료일을 조정해 줬다. 김영란법에 따르면 국립대도 공공기관에 해당하기 때문에 치료 순서를 앞당겨 달라고 해도 청탁에 해당된다. 비록 B씨가 자신의 이익과 무관하게 어려운 상황에 처한 외국인을 도우려는 순수한 마음이었다고 해도 엄연히 위법이다. A는 1000만원 이하의 과태료 부과 대상이 되고, 사회단체 직원 B씨에게는 2000만원 이하 과태료가 부과된다. 병원 관계자도 2000만원 이하 과태료나 형사처벌을 받을 수 있다.

김영란법에서 허용하는 것은 공익적 목적이 있는 청탁뿐이다. 예를 들어 한우가 유명한 경북 지역의 주민 A씨가 “김영란법 때문에 고가의 선물세트가 잘 팔리지 않아 축산업이 어려워졌다”며 국회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 소속 국회의원 B씨를 만나 김영란법 개정안을 부탁하는 경우다. 이는 공익적 목적으로 제3자의 고충민원을 전달했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는다. 국민권익위는 부정청탁에 대응하는 방법도 소개했다. 처음 부정청탁을 받으면 거절의사를 명확히 해야 하고, 그래도 부정청탁을 받는다면 상·하급자 등의 핑계를 대거나 바쁜 업무 혹은 선약이 있다는 등의 이유를 내세워 접촉을 피하라고 권했다. 부득이 만나게 될 경우엔 민원실 등 공개된 장소를 활용하라고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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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운 기자 pirat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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