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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지성] '에릭 호퍼 자서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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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이 기록되는 장소가 '창백한 종이(tabula rasa)'만은 아닐진대 평생을 길에서 사색한 자의 내면은 어떤 모습일까. 81세의 삶 대부분을 품삯 일꾼.레스토랑 보조 웨이터.사금채취공.부두노동자로 전전한 미국 사회철학자 에릭 호퍼(1902~83.사진)의 자서전'Truth Imagined'가 번역돼 나왔다. "삶을 관광객처럼 살았다"는 이 떠돌이 사상가의 유일한 학교는 손때 묻은 책이었고 사유의 거푸집은 빈자(貧者)의 일터였다.

신간은 말년의 호퍼가 술회하는 27개 에피소드로 이뤄졌다. 소설을 썼어도 좋았으리라는 세평에 걸맞게 일화 하나 하나가 독립된 흡인력을 지녔다. 첫 장에선 독일계 이주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18세에 길을 떠나기까지가 묘사된다.

7세 때 잃은 시력을 8년 만에 돌연 회복한 호퍼는 다시 눈멀기 전에 모든 것을 읽고 싶다는 갈망에 사로잡힌다. 방대한 독서 습관이 형성된 시기가 이 때다. 아버지와 사별한 후 호퍼는 캘리포니아에 가기로 결심하는데, 그 곳은 노숙할 수 있을 정도로 날씨가 온화했고, 길가에는 오렌지가 열려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후 에피소드는 길 위에서 만난 인간 군상의 기록이다. 호퍼는 생이 길이라는 비전에 매달렸고 일상에 안착하길 거부했다. 농부.양치기.일용직 잡부들 틈에서 그는 책에서 배우지 못한 사유의 실마리를 발견하곤 했다.

특히 엘센트로의 부랑자 임시수용소에서 호퍼는 떠돌이와 개척자 사이의 친족적 유사성에 눈을 뜬다. "성공을 거둔 사람은 제자리에 안주하는 것이 보통이다. 지금 떠돌이 노동자와 부랑자 대열에 합류해 줄을 설 것 같은 타입의 사람들이 이전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아마도 개척자의 대다수를 이뤘을 것이다."

독서와 노동, 사색으로 점철된 일생 동안 호퍼는 자서전을 포함, 11권의 저술을 남겼다. 특히 1951년 출간된 첫 저서 '맹신자들(The True Believer)'은 나치를 비롯한 대중 운동의 본질을 '좌절한 이들의 심리학'으로 규정, 학계의 이목을 끌었다.

강혜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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