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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아직도 못 배운 단어, 부끄러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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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안혜리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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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혜리
라이프스타일 데스크

부끄러운 사람은 없고 억울한 사람만 넘쳐난다. 요즘 대한민국 얘기다. 불거진 의혹에 “억울하다”고 했다가 결국 “죄송하다”로 마무리 짓는 걸 수없이 봐왔지만 여전히 이 뻔한 패턴에 적응이 잘 안 된다. 일면식 없는 사람조차 부끄러울 지경인데 정작 당사자들은 아무도 부끄러워하질 않으니 말이다. 사재만 400억원대인 대기업 오너가 고작 10억원의 손실을 회피하겠다고 미공개 정보를 이용해 보유 주식을 매각하고, 유력 정치인의 사위라는 부장검사는 친구라는 이름을 앞세워 한 사업가를 ‘삥’ 뜯는 걸로도 모자라 협박과 음해까지 해가며 동네 양아치 수준도 안 되는 행태를 일삼아온 게 드러났다. 부끄러움으로 치자면 본인은 물론 부인과 처조카까지 두루두루 살뜰히 챙기면서 온갖 쓴소리를 다 했던 전직 유력 언론인도 빼놓을 수 없겠다. 이들 중 누구도 자신의 과오가 부끄럽다며 사과하는 걸 보질 못했다.

 큰 잘못을 저지른 건 아니지만 이해할 수 없기는 김재수 신임 농림축산식품부 장관도 마찬가지다. 인사청문회 과정에서 불거진 각종 의혹에 대해 그는 “모함과 음해, 정치적 공격이 있었는데 이는 시골 출신에 지방 학교를 나온 ‘흙수저’라 무시당한 것”이라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장관까지 오른 인물이 ‘흙수저’ 운운하며 공개적으로 무시당했다고 불만을 늘어놓는 것도 우습지만 이를 단순히 한 남자의 열등감으로 치부하기엔 뭔가 꺼림칙하다. 달라진 국민의 눈높이를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게 드러난 데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몰염치 때문이다.

 사실 김 장관뿐 아니라 인사청문회에 선 고위 임명직 대부분이 “내가 그렇게 나쁜 사람인가”라는 당혹감을 느낀다고 한다. 나름 열심히, 그리고 정직하게 살아왔다고 자부했는데 과거의 관행에 발목 잡혀 온갖 비리를 저지른 사람처럼 비치는 데 대한 억울함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인사청문회가 자질 검증보다 망신 주기로 변질된 측면도 분명 있다. 하지만 보통 국민 눈높이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에 대한 의혹이 제기됐다면 억울하다고 할 게 아니라 스스로의 처신을 돌아보는 게 공직자의 도리가 아닐까. 그런데 제기된 의혹을 부끄러워하기는커녕 의혹 제기 자체를 정치적 공격으로 맞받아쳤다.

 정치인에겐 부끄러움을 아는 염치와, 유머를 구사할 줄 아는 재치, 그리고 말 한마디에도 여운이 남는 운치의 ‘삼치’가 필요하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정치인에게 필요한 재치·운치까지는 아니더라도 누구나 최소한 염치는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

안혜리 라이프스타일 데스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