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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론으로 떨어뜨리는 대북 ‘정보 폭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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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남정호
남정호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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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정호 논설위원

1980년대 공산치하 시절, 동독 화장품에선 어느 나라 제품보다 섹시한 향기가 났다. 동독인들이 즐겨 봤던 서독 TV 때문이었다. 동독 여성들은 서독 TV의 화장품 광고를 액면 그대로 믿었다. 이것만 바르면 남자가 줄을 설 것으로 착각했다. 동독제가 성에 찰 리 없었다. 여성들의 불만이 커지자 동독 정부도 가만있을 수 없었다. 화학자들을 시켜 온갖 달콤한 향의 화장품을 개발했다. 그럼에도 동독 여성들은 흡족하지 않았다. 광고의 속성을 몰랐던 탓이다.

당초 동독 당국은 서독 TV 시청자를 잡아내기 위해 오만 꾀를 냈다. 교사로 하여금 아이들에게 “가장 좋아하는 프로가 뭐냐”고 물어 불온 가정을 색출토록 했다. 정책이 있으면 대책이 있는 법. 동독 부모는 그런 질문에 어떻게 답해야 하는지 가르쳤다. 애들이 잠든 뒤에만 TV를 봐 단속을 피하기도 했다. 동독 정부는 결국 두 손을 들고 73년부터 서독 TV 시청을 허용한다. 미디어의 위력을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지난 9일 김정은 정권이 5차 핵실험을 감행하자 내부로부터의 북한 붕괴 외에는 답이 없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동독처럼 스스로 무너지게 하려면 꼭 필요한 게 외부세계에 대한 정보다. 동독의 전례로 봐서 북한 주민이 남한의 영화나 드라마, 쇼를 볼 수만 있다면 그만한 게 없다.

불행히도 TV 송출 방식이 남쪽은 NTSC, 북쪽은 PAL로 달라 북한에서 남한 방송을 보는 건 불가능했다. 하지만 이런 불통 상황은 기술 발달로 달라졌다. 북한에서도 PC, DVD플레이어가 흔해지면서 남한 영화·드라마도 볼 수 있게 됐다. 이에 맞춰 대북 단체들은 남쪽 영상물을 담은 USB·DVD를 풍선에 묶어 날려 보내고 있다. 심지어 몇몇 단체는 헬리콥터형 드론으로 보낸다. 물건을 실은 풍선이 바다에 빠지거나 되돌아오는 일이 잦은 탓이다.

미 국무부도 최근 외부 정보의 북한 내 확산을 돕기 위한 ‘대북정보 유입 보고서’를 의회에 냈다. 미 행정부도 적극 나서겠다는 신호다.

이런 정보 폭탄을 북녘 땅에 떨어뜨릴 때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과거 서독 정부는 공산체제를 노골적으로 비판하는 내용은 내보내지 않게 조심했다. 그래야 동독 정부도 대충 넘어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우리도 정치적 냄새가 배어 있지 않은 드라마나 영화를 들여보내는 게 바람직하다. 그 정도로도 남북한 간 우열이 단박에 판가름 나 김정은 정권의 기반은 뿌리째 흔들릴 것이다.

남정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