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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작 ‘해독’이 필요한 건 우리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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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애 기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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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애
런던특파원

제목이 근사했다. ‘탑승하시오! 시골 버스’(All aboard! the Country bus)였다.

 요크셔데일스를 횡단하는 유일한 대중버스에 대한 얘기라고 했다. 요크셔데일스가 어디인가. 강·계곡·구릉이 이어지는 잉글랜드 북부 아닌가. 을씨년스러운 날엔 어디에선가 히스클리프의 울부짖음이 들리는 듯한 황무지지만 햇살 가득한 날엔 목초지와 숲, 잡초와 낮은 관목들이 만들어내는 색채에 천계(天界)인가 싶어지는 곳이다. 기대가 컸다.

 두 시간 프로그램은 리치먼드에서 손님을 태우는 장면부터 시작했다. 이내 독특하다는 걸 깨달았다. 버스의 전방 카메라로 잡은 듯한 장면이 거의 다였다. 간혹 버스 안 풍경이 잠깐 잠깐 곁들여질 뿐이었다. 해설하는 이도 음악도 효과음도 없었다. 그래픽 처리된 설명만 볼 수 있었다. TV에서 나는 소리라고 해야 새의 지저귐, 양·소 울음, 스쳐 지나가는 자동차음 정도였다.

 이건 뭐지 싶었다. ‘슬로 라이프’의 부분집합격인 슬로 TV라고 했다. 정신없이 돌아가는 현대 생활에 대한 해독제가 되길 바라는 프로그램이었다. 투덜거렸다. 조금만 나가면 공원이고 조금 더 나가면 온통 녹색인 곳에서….

 그러고 보니 요즘 부쩍 자주 듣게 되는 ‘디지톡스’도 같은 취지였다. 해독한다는 의미의 디톡스와 디지털의 합성어였다. e메일·소셜미디어 등 인터넷과 단절하는 시간을 갖겠다는 것이다. 한 지인이 산장에서 와이파이를 찾았더니 동행했던 이가 “여기까지 와서 인터넷을 하느냐”고 놀라더란 일화가 떠올랐다. 마라도에서도 LTE가 터지는 우리로선 상상하기 어렵겠지만 사실 런던 내에서도 얼마든 디지톡스가 가능하다. 지하에서도 건물 안쪽에서도 끊기곤 하니까. 런던 밖에선 먹통인 곳도 많다. 스마트폰 단말기에 코를 박고 있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인터넷 환경이란 의미다.

 ‘있는 사람들이…’ 싶다가도 정신적 압박이 심한 일상을 지속할 수도, 해서도 안 된다는 것을 아는 게 그나마 건강한 상태란 데 생각이 미쳤다. 누군가, 스트레스 실험에서 최후까지 생존한 쥐가 그 무리에선 가장 강할 순 있으나 그런 대상이 안 된 쥐들보다는 허약한 상태라고 했던 말이 기억났다.

 근래 한국에서 들려오는 건 과연 어디까지, 언제까지 견딜 수 있나 전 국민을 대상으로 가혹 실험하는 듯한 소식들뿐이다. 한동안 쉬자. 나만 생각하자. 빈둥거리자. 이만큼 버텨낸 자신을 대견스러워하자. 추석 기간만이라도. 그래야 산다.

고정애 런던특파원